▲ 사진=한국노총 중앙연구원
남과 북은 지난달 26일과 28일 판문점에서 ‘철도협력 분과회담’과 ‘도로협력 분과회담’을 잇달아 열어 동해선·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노후화된 시설을 현대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위한 공동연구조사단을 구성하고 경의선 북측 구간에 현지 공동조사를 벌일 계획이다. 4월27일 진행된 남북정상회담 이후 군사적 긴장완화 방안(장성급 군사회담)·체육 교류(체육회담)·인도적 사안(적십자회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데 이어 경제협력 문제까지 논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노동조합총연맹·전국공공산업노동조합연맹·이용득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공동주최하고 한국노총중앙연구원이 주관한 ‘평화번영 시대, 남북경협의 의미와 노동조합의 과제’ 토론회가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번 토론회는 과거 남북경협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공기업 노동자와 전문가들이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이를 토대로 한반도 평화번영과 지속발전의 길을 모색하려는 취지로 마련됐다. 주간 <노동N이슈>가 이날 토론회 내용을 지상 중계한다.
개성공단 사업의 빛과 그림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4월27일 열린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적대와 대결로 점철된 분단질서를 허물고 공존·공영을 바탕으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나아가겠다고 선포했다. 남북 정상이 서명하고 공동 발표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판문점선언)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그날 이후 역사의 수레바퀴가 빠르게 돌고 있다. 6월12일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첫 정상회담에서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북미관계 정상화 의지를 담은 포괄적 내용의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양측이 적대관계 청산과 신뢰구축을 위한 첫걸음을 뗐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남북·북미 정상회담은 남북의 실질적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감도 높이고 있다. 문제는 현실의 벽이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해제되지 않는 한 남북경협은 아주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최근 남북이 철도·도로를 연결하고 노후화된 시설을 현대화하기로 합의한 것은 고무적이다. 남북경협이 우리경제에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란 기대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날 토론회는 남북경협의 대표적 성공 모델로 꼽히는 개성공단 사업의 현재적 의미를 고찰하는 대목에서 시작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6년 2월 개성공단 가동이 전면 중단되기 전까지 135개 입주기업에 5만6천여명(북한 노동자 5만5천명)이 근무했다. 연간 생산액은 5억6천만달러 수준이다.
‘개성공단 사례를 통한 남북경협 경험과 시사점’을 발제한 이유진 KDB산업은행 통일사업부 연구위원은 개성공단 사업의 질적 측면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놓았다. 이유진 연구위원은 “최근 중소기업중앙회와 개성공단기업협회가 실시한 조사결과를 보면 입주기업 96%가 ‘개성공단 재개 시 재입주 의향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며 “과거 인적교류 경험을 통해 북한 노동자들의 숙련도와 생산성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눈 여겨 볼 대목은 ‘무조건 재입주하겠다’고 밝힌 기업(26.7%)보다 ‘정부와 북측의 재개 조건과 상황을 판단한 뒤 재입주하겠다’는 기업(69.3%)이 두 배 이상 많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 때 급작스럽게 이뤄진 공단 가동중단 조치로 막대한 피해를 본 경험이 반영된 수치다. 당시 입주기업들이 신고한 피해금액은 총 9천446억원에 달한다. 그 뒤 베트남 등 해외로 나가 공장을 지은 기업들은 개성공단보다 높은 인건비와 외국 노동자의 기술경쟁력 부족, 공장 신축에 따른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력 구조조정 문제도 심각하다. 개성공단 남측 주재원 804명 중 70%가 구조조정되고, 이 중 40%는 미취업 상태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2017년 12월 기준).
이유진 연구위원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입주기업에 대한 구제제도 같은 안전장치 마련이 시급하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치적 영향에 의해 경협이 중단되지 않도록 ‘정경분리’ 원칙을 수립하면서 양자 및 다자간 협력의 틀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남북경협이 어느 일방이 아닌 남북 모두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새로운 모델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도 내놓았다. 이 연구위원은 “개성공단처럼 북한에 특구를 만드는 방식은 물리적으로 시간이 많이 든다”며 “북한에서 가까운 파주 등에 특구를 만들어 북한 노동자들이 출퇴근하는 협업시스템을 갖춘다면, 일본·중국 같은 경쟁국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면서도 남북한 전체의 일자리가 늘어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
70년간 끊긴 ‘민족의 혈맥’ 다시 이으려면
연원을 따져 보면 남북경협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1988년 노태우 정부가 발표한 ‘7·7 특별선언’은 남북교역을 ‘민족 내부의 교역’으로 규정함으로써 90년대 이후 남북교역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하지만 북핵문제를 중심으로 국제정세가 요동치면서 남북경협도 부침을 거듭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강화되고, 2010년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침몰사건을 계기로 남북교역을 전면 중단하는 내용의 5·24 조치를 발표하면서 노태우 정부 7·7 특별선언 이후 시작된 남북교류가 원천적으로 봉쇄됐다.
문제는 포괄적 대북제재 해제가 전제되지 않는 한 의미 있는 경제협력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하지만 밤이 깊어 갈수록 새벽이 가까워 온다고 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판문점선언 시대 남북경협 추진 여건과 SOC사업 추진 전망’을 발제한 임을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ICNK 센터장은 “여러 제약조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가 새로운 경제 번영의 기회를 맞은 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임 센터장은 “비핵화 걸림돌만 제외하면 남북경협을 추진하는 데 있어 굉장히 좋은 조건이 형성돼 있다”면서 ‘북한의 변화’에 주목했다. 그는 북한이 구조적·본질적으로 달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2012년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뒤 북한의 경제구조는 빠른 속도로 변해왔다. 이듬해인 2013년 11월부터 총 4회에 걸쳐 22개의 경제개발구를 지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아버지 세대인 김정일 위원장 시대의 경제특구가 개성·신의주·나선·금강산 같은 접경지역에 집중됐던 것에 비해, 김정은 위원장은 평양 인근에만 5개의 경제개발구를 지정하는 등 외부 자본유치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또 판문점 정상회담 일주일 전인 4월20일 당중앙위 제7차 3기 전원회의를 열어 기존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폐기하고, ‘사회주의 경제건설 총력노선’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임 센터장은 “북한이 새로 채택한 노선은 ‘체제를 보장하면 인민생활 향상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향후 남북경협의 진전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리 정부의 남북경협 추진 의지도 확고하다. 그 중에서도 철도·도로 연결사업은 문재인 정부가 구상하는 ‘한반도 신경제구상’의 토대를 이룬다. 서해안과 동해안, 비무장지대(DMZ) 지역을 H자 형태로 동시 개발하는 남북 통합개발 전략인 한반도 신경제구상은 남북 간 교통망 연결이 전제돼야 한다([그림1] 참조).
[그림1] 문재인 정부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이 판문점 선언 1조의 내용이다. 해당 조항은 “남과 북은 남북관계의 전면적이며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 나갈 것이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구체적으로는 ①민족자주 원칙 확인, 기존 남북 선언·합의 철저 이행 ②고위급회담 등 분야별 대화 개최, 실천대책 수립 ③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성지역 설치 ④각계각층의 다방면적 교류·협력과 왕래·접촉 활성화 ⑤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 행사, 남북적십자회담 개최 ⑥10·4선언 합의사업 적극 추진,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등 6개항을 담고 있다.
이 중 핵심은 6번째 조항으로,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체결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에서 합의한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10·4선언은 남북경협 사업 중에서도 가장 큰 축을 이루는 SOC 사업의 청사진을 담고 있다. 무려 48개의 개발 프로젝트를 포함하고 있다([그림2] 참조).
[그림2] 10·4선언과 남북 S0C사업 공동개발 프로젝트
임 센터장은 “당시 합의내용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 정부도 한반도 신경제구상의 틀 안에서 사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재배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전개될 대북 SOC사업의 주요 분야를 소개했다([표1] 참조).
임 센터장은 이어 “대북제재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전격적인 SOC사업 착수는 어렵겠지만, 제재 수위가 낮아질 때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며 “당장은 남북 공동연구나 학술교류 등을 통해 북한 관련 데이터들을 축적하면서 지금 단계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협사업과 대규모 인프라 개발에 필요한 자금조달과 리스크 분담방안을 마련하고, 경협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한 정부차원, 민관차원, 민간 간 거버넌스를 정비하는 일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공공부문 역할 중요” … “노동조합도 적극적 지원자 돼야”
이날 토론회에는 김봉준 한국토지주택공사(LH) 북한센터장과 위어량 전국전력노동조합 사무처장이 토론자로 참석해 대북 SOC사업 참여 주체로서의 고민과 과제를 공유하기도 했다.
김봉준 센터장은 대북 SOC사업 초기 투자과정에서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조했다. 대북 SOC 사업이 본격화되더라도, 막대한 초기 투자비용 부담 때문에 민간부분이 뛰어들기에는 리스크가 크다는 이유에서다.
김 센터장은 “대북제재가 완화돼 북한이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IMF)·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금융기구를 통한 재원조달을 받으려 해도 회원가입조건과 자금지원조건이 까다로워 쉽지 않을 것”이라며 “민간투자자들도 리스크가 크고 수익성 확보가 곤란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센터장은 이어 “결국 중국 등 주변국의 공적개발지원금(ODA), 남북협력기금 등 정부기금, 공공기관의 투자 정도가 초기에 조달 가능한 재원”이라며 “이 대목에서 중국 등 주변국의 북한 인프라시장 선점에 대비하고 남북이 중심이 된 한반도 신경제구상을 실현하려면 공공부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전력노조 위어량 사무처장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지역 전력망의 유기적 연계 방안에 주목했다. 위 사무처장은 “전기는 발전과 동시에 소비해야 하고 별도로 저장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며 “이런 이유로 북미·유럽·북아프리카·중동 지역에서는 국가 간 전력연계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중국-일본-러시아의 전력망을 잇는 ‘동북아 슈퍼그리드’ 구축이 그저 허황한 주장이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전력·가스·철도 분야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같은날 한국전력은 러시아 국영 전력기업 로세티(ROSSETI)와 ‘한-러 전력연계 공동연구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위 사무처장은 “원전 하나를 짓는 데 1조원가량이 소요되는 점을 감안할 때, 러시아의 저렴한 전기를 수입해 북한과 남한이 공급받는 방식을 긍정적으로 고려할만 하다”며 “이를 위해서는 북한의 노후화된 송전계통망을 개·보수하는 일이 선행돼야 하는데, 이때 남한의 공공기관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한국노총을 대표해 토론자로 나선 권재석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은 남북경협과 대북 SOC사업 활성화를 위한 노동조합의 역할을 강조했다. 권 본부장은 “대북제재가 완화될 경우 남북경협은 SOC사업을 중심으로 추진될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최고의 기술과 인력을 보유한 남측 공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북측 전역에 각종 기반시설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남측 공기업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되며, 동시에 정부와 기업(공기업․사기업)․노동조합의 상호소통과 거버넌스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권 본부장은 이어 “한국노총 산하 노조가 조직된 공기업과 북측 조선직업총동맹 산하 공기업의 만남을 주선할 것”이라며 “남북 공기업 노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한 공동의 과제를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