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정부 노동정책의 비밀 ‘최저임금 인상’·‘비정규직 정규직화’·‘노동시간 단축’ 등 문재인 정부의 주요 노동정책들은 공교롭게도 ‘인금 인상 억제방안’을 동반하고 있다다. <사진=한국노총 중앙연구원>
문재인 대통령은 결국 최저임금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당초 정부·여당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법안을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이 거부하리라 기대한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여야가 압도적 찬성률로 의결한 법안을 거부했을 때 뒤따를 정치적 혼란을 견뎌낼 만큼 ‘맷집’ 좋은 정부도 아니다.
문제는 이 대목에서 시작된다. 정부·여당이 보수야당과 손잡고 저임금 노동자들의 월급봉투를 위협하는 법안을 처리한 탓에 문재인 정부와 ‘전략적 동맹’ 관계를 유지해 온 노동계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더구나 한국노총은 문재인 대통령과 ‘노동존중 대선승리 정책연대협약’을 확약하고 현 정부의 ‘노동존중사회’ 기조를 함께 만든 정책파트너다. 한국노총으로서는 정부와 손을 잡을 수도, 그렇다고 안 잡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됐다. 노정관계 전략·전술의 재점검이 필요한 때다.
문재인 정부 노동정책의 미스터리
최저임금법이 개정되는 과정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경제 관료가 데이터가 아닌 ‘직관’을 앞세워 최저임금 인상 속도 조절론을 역설한 것도 상식 밖이고, 집권여당 원내대표가 노동조합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며 법안 처리를 주도한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백 번 양보해 최저임금 인상이 우리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정부·여당 주장이 사실이라도, 정권의 책임자들은 진정성 있는 자세로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했어야 한다. 힘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법안 처리 결과는 더욱 암울하다. 보수적으로 집계한 정부통계를 적용해도 저임금 노동자 21만6천명의 기대이익이 줄어들게 생겼다. 최저임금이 오르더라도 실제 손에 쥐는 월급은 그대로인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규모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복잡한 법안 내용 때문이다. “임금의 최저수준을 보장해 노동자의 생활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최저임금법의 입법취지가 무색해졌다. <최저임금법 개정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6월4일자 노동N이슈 제8호 참조>
돌이켜보면 최저임금법 처리과정만 이상한 건 아니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노동정책들은 어딘가 의아한 구석이 있다. 현 정부의 1호 노동정책인 공공부문 비정규직 전환 정책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5월12일 비정규직이 가장 많은 공공기관인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았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노동자들은 이날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선언’에 환호했다. 한데 상황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이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고용안정’과 ‘격차 해소’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임금 개선효과가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공공부문 대다수 기관은 상시‧지속적 업무를 수행하는 비정규직을 직접 고용하기보다는 자회사를 세워 채용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정부의 예산 · 정원 대책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또, 기존 정규직과의 임금·복리후생 차별 시비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진행된 공공부문 정규직화 사례를 봐도 임금 상승효과가 매우 제한적이다.
정부가 공공부문 정규직화와 연동해 청소·경비·시설관리·조리·사무보조 등 5개 직종에 도입하려고 하는 표준직무급제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기준임금 수준과 근속에 따른 인상률이 지나치게 낮게 설계됐기 때문이다. 고용불안이 해소돼도 노동자들의 월급봉투는 그대로라는 뜻이다. ‘저임금의 고착화’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소득 없는 소득주도 성장?
노동계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기 시작한 건 노동시간 단축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부터다. 2월28일 국회 본회 의에서 가결된 근로기준법 개정안의 핵심은 한 주의 법정 노동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이는 것이다.
법안이 처리된 후 노동계 반응은 엇갈렸다. 노동시간 단축의 전기가 마련됐다는 긍정적 평가가 우세했지만, 법안 처리과정에 나타난 ‘노동계 패싱’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부·여당은 국회에서 조율 중이던 법안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채 법안 처리를 강행했다. 노동계는 언론보도 내용을 조합해 법안 내용을 유추해야만 했다. 핵심 노동조건인 노동시간에 대한 법률을 논의하면서 이해당사자인 노동계를 정보로부터 소외시킨 것이다(이런 상황은 석 달 뒤 최저임금법 처리 과정에서도 되풀이됐다).
결국 노동계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뒤에야 구체적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동시간 단축 외에 ‘휴일노동수당 중복할증’ 여부가 쟁점이었는데, 개정법은 기존대로 휴일노동 때 통상임금의 0.5배만 수당으로 지급하는 내용으로 정리됐다. 노동부가 2000년 “휴일근로는 연장근로가 아니다”라는 행정해석(근기 68207-2855)을 내놓으면서 시작된 휴일노동수당 중복할증 문제가 끝내 노동자들의 임금 손 실로 귀결된 것이다. 중복할증이 인정됐다면 지급받을 수 있었던 3년치 미지급 수당과 이자를 못 받게 된 데다, 앞으로 추가수당을 청구할 수도 없게 됐다.
정부가 지난달 17일 내놓은 ‘노동시간단축 현장안착 지원대책’도 듣는 이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노동부는 노동시간 단축 입법으로 근기법 제59조(근로시간 및 휴게시간의 특례) 적용에서 제외된 21개 업종에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적용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특정 근무일의 노동시간을 늘리면 다른 근무일의 노동시간을 줄여 일정 기간(2주 또는 3개월) 평균 노동시간을 법정 한도에 맞추는 일종의 변형근로시간제다. 특정 주에 최대 80시간(3개월 단위, 2개월 단위의 경우 76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다. 한 주 최대 노동시간 상한을 52시간으로 줄인 근기법 개정 취지에 역행한다.
임금 측면에서도 우려스럽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적용하면 초과노동에 대한 할증률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회가 근기법을 개정하면서 1단계로 휴일노동수당 중복할증 여지를 차단한 데 이어, 정부가 후속대책을 내놓으면서 2단계로 초과노동수당에 대한 할증률 적용까지 배제하는 쪽으로 제도운영의 방향을 잡은 것이다. 기본급이 적고 변동급이 많은 임금체계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수당 할증을 배제하는 쪽으로 설정된 제도가 노동자와 사용자 중 누구에게 유리한 지는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이쯤에서 공통적인 현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비정규직 정규직화’·‘노동시간 단축’ 등 문재인 정부의 주요 노동정책이 공교롭게도 ‘인금 인상 억제방안’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강조해온 ‘소득주도 성장’ 전략과는 어울리는 않는 조합이다. 오히려 ‘소득 없는 소득주도 성장’에 가깝다. 노동계가 ‘설마…’ 하는 사이 정부정책의 노동 배제적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정부·여당의 ‘노조 탓’, 무능의 자기고백
다시 최저임금 문제로 돌아가면 지난해 최저임금은 시급 기준 6천470원, 올해는 7천530원이다. 1천60원 올랐다. 이를 월 209시간으로 환산하면 22만1천540원, 연간으로 계산하면 265만8천480원이 된다.
최저임금법 개정으로 “중위임금 연봉 2천500만원 이하 노동자 680만명을 더 보호할 수 있게 됐다”는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계산하면, 내년에 올해만큼 최저임금이 인상될 경우 약 18조원이 추가로 소요된다. 여기서 정부 지원액 3조원을 빼면 사용자들이 지불하는 몫은 15조원이다. 지난해 국내총생산(명목GDP) 1천730조4천억원의 0.87%에 해당하는 액수다.
하지만 개정법이 상여금에 복리후생비까지 최저임금 산입 범위에 포함한 탓에 사용자들이 실제로 지불할 몫은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기업의 이익이 노동자들에게 충분히 돌아가지 않는다. 국민소득에서 노동소득(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뜻하는 노동소득분배율은 지난해 기준 63.0%로 전년보다 0.3%포인트 하락했는데, 이 같은 불균형 상태가 심해질 수 있다. 불균형 상태를 바로잡기 위한 해법은 없는 걸까.
사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다만 정부가 이를 힘 있게 밀고 나갈 의지와 실력을 갖추고 있느냐가 문제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대표되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 전략은 그 내용이 지나치게 빈약하다.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겠다’는 전략만 설정해 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 전술을 마련하지 않은 채 지난 1년을 흘려 보냈다.
정부·여당은 영세 자영업자들이 짊어지게 될 비용부담만 강조했지, 이들의 지불능력을 높여줄 정책은 내놓지 않았다. 자영업자들의 숨통을 터주려면 과다한 임대료와 수수료 부담을 낮춰 주는 것이 최선이다. 이는 정부·여당의 적극적 개입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시장에 맡기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최저임금 시장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재벌기업에 대한 개혁적 조치도 찾아보기 어렵다. 정부·여당은 경제력이 집중된 재벌기업을 겨냥한 공정한 과세 방안도, 재벌가 부의 세습을 차단하고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기업지배구조 개선 방안도 내놓지 못했다. 대기업의 골목상권 점령과 자영업자 또는 하청업체를 상대로 한 비용전가 문제에 대해서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비난의 화살을 노동계로 돌렸다.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정부·여당이 노동계에 화풀이를 하고 있는 꼴이다. 최저임금 인상이 시장에 부담을 줬다면, 그건 정부·여당의 무능력 때문이지 노동조합의 잘못이 아니다.
‘노동조합이 대기업 정규직의 이해만 대변한다’는 정부·여당의 주장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 전략은 저임금 노동자를 중산층으로 끌어올려 경제를 살리겠다는 취지다. ‘낙수효과’가 아니라 ‘분수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노동조합을 코너로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 고용과 임금의 안정을 중요시하는 노동조합이 커질 때 중산층이 늘어날 가능성도 커진다. 정부가 노동조합을 공격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보호받을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문재인 정부 1년 ‘노정갈등의 잠복기’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강행 처리된 뒤, 극심한 노정갈등을 겪었던 노무현 정부의 실패가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노동정책 목표로 ‘사회통합’을 내걸었던 참여정부는 2003년 6월 철도노조 파업에 경찰력을 투입해 노동자들을 대거 구속한 사건을 계기로 걷잡을 수 없는 갈등국면에 빠져들었다. 그 뒤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과 비정규직법 입법 강행이 노동계의 직접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참여정부 노동개혁은 시동도 걸어보지 못하고 꺼져버렸다. 사회적 대화가 단절되고, 민주적 절차의 합의와 조정에 실패한 정부는 ‘법과 원칙’을 강조하며 번번이 노동계와 대립각을 세웠다.
물론 지금의 상황이 그 때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올해 상반기 한국지엠 군산공장·금호타이어·성동조선해양·STX조선해양 등에서 구조조정 문제가 불거졌지만 이들 사업장에서 예년 같은 대규모 노사분규가 전개되지는 않았다. 과거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 등을 통해 노동계가 ‘승리 없는 싸움’에 대한 무기력감을 학습한 결과다. 덕분에 문재인 정부 노정관계는 돌출 변수 없이 순항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노정갈등의 잠복기였을 뿐이다. 집권 1년을 겨우 넘은 시점에 ‘노조 이기주의’ 프레임을 들고 나온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의 모습에서 노동조합을 정책파트너가 아닌 포섭대상으로 여기다 몰락의 길을 걸었던 노무현 정부가 겹쳐 보인다. 더구나 현 정부는 더욱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다. 대놓고 노동조합을 공격하고 이를 정책으로 관철하려 했던 참여정부와 달리, 현 정부는 노동조합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한 뒤 정책내용을 교묘하게 뒤트는 방식을 즐겨 쓰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인상·비정규직 정규직화·노동시간 단축 같은 주요 노동정책들이 결국 임금인상 억제 정책으로 귀결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전체 저임금 노동자의 화를 부르는 위험한 태도다.
노동조합, 무엇을 해야 하나
이런 때일수록 노동계도 대오각성 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가 노동을 존중하는지 아닌지, 정부를 상대로 대화를 할 건지 말 건지 판단하느라 갈팡질팡하는 일은 소모적이다. 먼저 노동계 내부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노동시간 단축 입법 때 정부·여당은 ‘노동계 패싱’에 대한 충분한 신호를 줬다. 그런데도 노동계는 최저임금법 처리 과정에서 다시금 뒤통수를 맞았다. 또,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최저임금 산입범위 논의를 끝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를 살리지 못한 것도 노동계로선 할 말 없는 대목이다. 정부·여당의 전략·전술 부재만 탓할 일이 아니다.
당분간은 ‘전략적 인내’도 필요해 보인다. 머지않은 미래에 사회적 대화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어느 시점에 정부가 화해 제스처를 내밀면 노동계가 마지못해 수용하는 모양새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그때까지 반격의 패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위원회에 복귀하게 된다면, 내년도 최저임금이 대폭 오르도록 협상력을 발휘해 저임금 노동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 새로 구성된 사회적 대화기구에 참여하게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부를 상대로 재벌 개혁과 영세 상공인 보호를 위한 대책 마련을 강도 높게 촉구하고, 노동조합 스스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준비가 됐을 때 노동계 숙원인 ‘노동기본권 보장’ 요구에도 힘이 실릴 수 있다. 노동조합만의 이해가 달린 사안을 관철하기 위해 무리하게 ‘거래’를 시도하는 태도를 경계하고, 전체 노동자의 권익을 높이는 방안을 우선 배치하는 전술적 접근이 필요하다. 산별노조 법제화나 단체협약 효력 확장, 또는 한국노총이 강하게 요구해 온 노동회의소 설치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노동조합의 전략적 판단과 세심한 접근이 필요한 대목이다. 노동존중·소득주도 같은 정부·여당의 영혼 없는 말잔치에 현혹될 시기는 지났다.<끝>
❙ 참고 문헌
- 이선향, 「노무현 정부 시기 노동정치의 갈등과 한계 」, 한국사회역사학회, 담론2011 14권1호, 2011년 2월
-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 「노무현 시대의 좌절」, 창비, 2008년 12월8일
- 허영구, ‘알바 주머니 털며 불평등한 사회를 원하나'성명, 평등노동자회, 2018년 6월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