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혜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 부장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현기영, <순이 삼촌> 중에서
위의 이야기는 소설에서 나오는 내용이지만 그 자체는 허구가 아니다. 비극적이지만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올해 70년이 되어도 그 진실이 다 밝혀지지 않은 ‘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주 4.3 항쟁 70주년, 한국노총은 제주 4.3의 진실을 마주하며 미래로 가는 길을 밝히고자 ‘제7회 한국노총 평화학교’를 개최, 5월 29일~31일까지 제주를 방문하였다. 2018년 5월 29일 여전히 아름다운 제주의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앞에 대구, 구미, 청주, 광주, 청주, 서울, 경기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노총 조합원 52명이 만났다. 그리고 이어진 2박 3일 간의 여정에서 우리는 눈시울 붉게 4.3의 진실을 목도하였고, 희생된 수많은 영혼 앞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노동자가 어떠한 역할을 해낼지 고민하는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7년 7개월의 악몽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했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귀환 인구의 구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다. 게다가 해방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나라는 미군정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잇따른 일제경찰의 미군정 경찰로의 재등장,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미곡정책의 실패가 연이어 나타나며 제주 일대는 물론 전체 사회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고 있었다.
결정적인 충격은 바로 ‘단독선거’의 개최였다.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나라의 ‘분단’이 단독선거의 강행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이 단독선거 반대를 외쳤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 역시 나라의 분단이라는 초미의 사건을 반대하고 나섰다.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렸고, 3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3.1정신으로 통일독립 전취’ 등의 구호를 외쳤다. 가두시위가 벌어지고 시위대가 관덕정 서쪽으로 빠져나갈 즈음에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어 다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다친 아이를 그냥 두고 가는 기마대를 향해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였고 이에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발포를 하여 민간인 6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사망자는 아기를 업은 여성과 학생, 구경꾼이었다. 민심은 더욱 악화되어, 3월 10일 경찰 발포에 항의하여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민·관 합동 총파업이 벌어졌다. 곧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고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 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민심은 더 흉흉해져갔으며 특히 서북(함경도 등) 출신 건달세력이었던 서북청년회의 만행은 매우 심각했다.
1948년 4월 3일, “탄압이면 항쟁이다”,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반미구국투쟁에 나서자”며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했다. 당황한 미군정 소속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으나, 결국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제주는 빨갱이섬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중산간 마을 95% 이상, 가옥 39,285동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영문도 모른 채, 산으로 피신한 주민 2만 여명도 결국 학살되고 말았다. 1949년 3월~6월 기간, 한라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에 대한 하산 회유작전,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죽음을 거치며 4.3은 일단락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4.3시기,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국 예비 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 (하산 회유작전 시 내려왔던 주민들)도 즉결 처분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지 만 1년이 지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제주 4.3사건은 실로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이 비극적인 사건이 1987년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세상에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9년이 되어서야 공개적인 추모행사를 시작할 수 있었고, 2000년이 되어서야 4.3특별법이 제정공포 되었으며, 2003년이 되었을 때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이는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비극을 차마 입에 담지조차도 못했던, 몰래 조용히 희생된 가족을 추모해야 했던 제주의 더욱 큰 슬픔이다. 아직도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큰 진척이 없으며 2017년 발의된 4.3특별법 개정은 아직 본격적인 심의도 거치지 못한 상황이다. 지난 정부시기 예산이 끊겨 중단되었던 유해발굴사업 역시 비로소 이제 다시 재개되고 있다.
70년 후 다시 “분단반대전쟁반대”
눈부신 제주의 모든 곳은 여전히 수많은 비극과 진실을 품고 있다. 우리가 돌아본 모든 곳,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와 수월봉 진지동굴부터 4.3 현장의 피해자 진아영 할머니의 생가,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이후 예비검속으로 집단학살이 이루어졌던 섯알오름에는 70년 전 억울하게 희생된 그들의 영혼이 남아있다.
몰랐던 어제에는 단지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오늘은 걷는 걸음마다 보는 풍경마다 스며있는 제주 사람들의 원혼과 원망을 직면할 수 있었다. 눈시울은 붉어졌고, 오늘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 고민하자라는 각오와 결심이 생겼다. ‘해방 이후 식민청산이 되었더라면’,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는 왜 약한 자로 서러움을 당해야했을까’, ‘제주 4.3과 미군정. 미국의 책임은 무엇일까’, ‘학살을 자행한 과거 권력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물어야할지’, ‘분단 반대, 단독선거반대라는 외침은 현재에는 어떻게 이어져야할까’…. 유적지를 걸으며 우리는 탄식처럼 이러한 대화를 나누었다.
분명한 것은 70년 전 제주에서 이들이 이루고자 했던 것은 분단반대, 전쟁반대였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한반도의 절실한 과제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일이다. 세계에서 전쟁가능성이 가장 높은 땅은 다름 아닌 삶의 터전인 이곳이다. 숨죽여 온 듯한 70년 전 제주는 역사의 미래,진실과 통일을 위한 희망의 줄기를 놓지 않았다. 제주 4.3은 오늘도 노동자에게 진실과 희망을 위하여 평화와 통일로 나아갈 것을 주문한다.
남북이 실로 오랜만에 만났다. 북미간의 대화도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70여 년 적대와 분열을 넘어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자주 만나야 하고, 소통하여야 하며 오해도 풀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도 키워 나가야 한다. 남북노동자 또한 서로 손을 잡고, 과거가 우리에게 바랐던 미래를 현실로 만들기 위한 실천과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