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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속에 이야기가 있다

등록일 2019년01월10일 09시25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오필민 컬럼리스트

 


 

문자가 만들어지고 가장 먼저 쓸모를 찾은 곳은 금고와 창고였다고 한다. 내 금고에 어떤 물품이 있고, 내 창고의 물품을 누구에게 빌려줬는지를 기록했다. 책을 쓰기 위해 글자를 만든 게 아니라 장부를 관리하려고 문자를 발명했다는 말이다.


에릭 호퍼는 관직을 박탈당한 이들이 최초의 작가였다고 말한다. 문자 발명 초창기에 글을 쓰는 사람은 회계 장부를 관리한 서기였다. 이들이 관직에서 쫓겨나면서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수메르가 최초의 인류 문명의 발상지다. 수메르 문명의 황금기에는 문헌 기록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수메르가 이웃한 아모리 인과 엘람 인에게 침입을 받으면서 수메르의 서기들이 자신들의 ‘찬란한 시절의 영광’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에서 기록문학이 등장한 때도 솔로몬 왕국이 무너진 뒤다. 솔로몬이 죽자 서기로 일했던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양치기를 했다. 이 서기들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분노한 글을 쓰며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 제자들이 서기였던 스승의 말을 기록했는데 이게 문학작품으로 남았다. 중국의 경우도 주나라 분열 뒤 춘추전국시대를 맞으며, 관직을 잃은 이들이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며 주장을 펼치고, 철학적 사색을 하며 기록문학을 남겼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활동한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도 장군으로 전장을 누볐다. 투키디데스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패하고 추방당하자 다른 장군들의 전투를 가슴 아프게 지켜보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마키아벨리도 외교관직을 잃고 난 뒤 낮에는 여인숙에서 잡담이나 카드놀이로 소일하다가 밤에는 집에 들어가 글을 썼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이다.


글은 자신에게 익숙했던 삶이 멈출 때 쏟아져 나온다. 자신 앞에 무한히 이어지리라 여겼던 길이 갑자기 끊겼을 때 말이다. 더 이상 걸어갈 곳이 없을 때 좌절하거나 분노하거나 허망함을 느낀다. 이야기는 바로 그 순간 터져 나온다.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남는 시간이 생겨야 예술이 탄생한다. 사냥을 하거나 곡식을 가꿀 때는 그림을 그릴 여유가 없다. 몸이 피곤하니 동굴에 들어가 잠자기 바빴을 것이다. 날씨가 추워져 사냥을 나갈 수도 없고, 농사를 짓기도 힘들다. 동굴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무엇을 할지 찾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사냥도구를 만들고, 누군가는 나무를 깎아 악기를 만들고, 벽에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삶속에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는 골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연 혹은 사람과 관계하며 노동할 때 이야기는 탄생한다. 이 이야기가 동시대의 이웃에게 전해지고 후대에 기억되기 위해서는 삶의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이야기가 글로 기록되기 위해서는 멈춤이 있어야 한다. 쉼 없이 달리던 삶이 멈춰 여유의 시간이 주어질 때 삶이 생산한 이야기가 글로 재탄생한다.


멈출 때 글이 나온다는 말은 멈춰야 삶을 성찰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달리는 기차에 타고서는 기차를 볼 수 없다. 기차가 역에 멈춘 뒤 열차에서 내려야 자신이 타고 온 열차를 볼 수 있다. 그때 알 수 있다. 처음에 타려고 했던 맞는지, 아니면 잘못 탔는지를.


2018년 달력 마지막 장이 초라하게 남아 있다. 풍성했던 달력 첫 장을 마주할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제 달리기만 했던 2018년의 길에서 잠시 숨을 가눌 필요가 있다. 새 달력에 자리를 내주기 전에 2018년을 어떻게 기록할까 생각한다.


일정으로 지저분해진 다이어리를 1월 1일부터 더듬으며 읽는다.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약속도 있지만 소중하게 가슴에 새겨진 만남의 이름도 있다. 아! 이런 일도 있었지, 하며 새삼 떠오른 얼굴도 있다.


몇몇의 이름을 다이어리에서 옮겨와 적는다. 그 이름과 함께 난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기록한다. 2018년이 가기 전 내 삶을 멈추고. 태안화력발전 김용균이라 적고, ‘일회용 용기에 담긴 컵라면’이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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