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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264’를 아시나요 

등록일 2019년01월10일 09시17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사진 설명: 1934년 6월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신원카드 속의 서른 청춘의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을 노래한 시인 이육사(1904~1944)는 안동시 도산면에서 나고 자랐다. 도산면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육사는 퇴계 이황(1502~1571)의 자손이다. 육사의 고향은 항일투쟁 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여섯 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육사 자신은 물론 그의 형과 동생들도 항일 투사로 살았다. 어머니는 항일 의병장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왕산 허위(1854~1908)의 가문으로 외가 친척들은 대다수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로 살았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유학도였던 육사는 1920년 대구로 나가기에 앞서 영천군 화북면 지주 집안의 딸인 안일양과 전통 혼인을 했다. 1924년 4월 일본 도쿄로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아홉 달 동안 처가가 있는 영천에서 사립학교 교원으로 일했다. 1925년 1월 대구로 돌아왔으니 도쿄 유학 기간은 아홉 달에 그쳤다. 도쿄에서 육사는 아나키즘 같은 급진 사상을 접했다.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청년 계몽 활동을 했던 그는 1925년 여름부터 베이징을 드나들며 중궈대학에서 수학했다.

 
1927년 10월 18일 대구 중앙로에 위치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앞에서 폭탄이 터졌다. 칠곡군 인동면 출신으로 만주와 소련에서 활약하며 거사를 꾸민 장진홍(1895~1930)은 대구를 빠져나갔으나, 일제는 대구 지역 청년 수백 명을 체포하여 악랄한 고문을 가해 범인을 조작했다. 육사를 비롯해 삼형제도 검거되어 고초를 겪다가 진범 장진홍이 잡힌 다음인 1929년 5월 풀려났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사태 확산을 막으려던 일제는 1930년 1월 10일 대구청년동맹과 신간회 대구지부 간부로 활동하던 육사를 구금했다. 아흐레 만에 풀려난 육사는 그해 2월부터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활동했다. 1931년 1월 20일 육사는 대구 시내에 나붙은 항일 격문의 배후조종자로 일제에 체포되어 고생하다 3월 23일 풀려났다. 체포 이유는 레닌 탄생일(1월 21일)에 따른 예비 검속이었다. 석방된 육사는 만주로 가서 의열단 활동가였던 윤세주(1901~1942)를 만나고 늦가을 귀국했다. 이즈음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겨 지방 주재기자로 활약했다. 


육사의 본명은 원록이고, 어릴 때 이름은 원삼이었다. 육사라는 이름은 감옥에서 쓰인 수인번호 264(二六四)에서 따온 ‘대구264’를 줄인 말로 ‘戮史’, ‘肉瀉’를 거쳐 ‘陸史’가 되었다. 20대 중반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을 썼다. 1932년 10월 20일 육사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1898~1958)이 장개석의 지원을 받아 중국 난징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로 입교했다. 1933년 4월 1일 발간된 정치잡지 <대중>에 이활이 쓴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과 ‘李戮史(이육사)’가 쓴 ‘레닌주의 철학의 임무’가 “싣지 못한 글의 목록”에 소개되었다. 당시 육사의 사상 편력을 짐작할 수 있다. 1933년 4월 20일 군사학교를 졸업한 육사는 난징을 거쳐 상하이에서 국내 잠입을 계획하면서 머무르다 중국의 대문호 루신을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1933년 7월 귀국한 육사는 서울에서 활동하다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 당했다. 처남인 안병철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이었는데, 1933년 11월 만주 창춘의 일제 헌병대에 자수를 함으로써 졸업생들이 줄줄이 붙잡히게 되었다. 이로써 김원봉의 국내 교두보 확보 계획은 망가졌다.  


1934년 6월 20일 석방된 육사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문학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1939년 8월 <문장>에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인 '청포도'를 발표했다. 서울과 경북 일대를 오가며 지내던 육사는 찬란한 조선의 문학가들이 친일 대열에 합류하던 무렵인1943년 4월 베이징으로 떠났다가 여름 무렵 귀국했다. 중국에서 무장 항쟁을 도모했던 탓인지 헌병대가 서울에서 육사를 체포하여 베이징으로 끌고 갔다. 1944년 1월 16일 육사는 일제가 베이징에 설치한 감옥에서 숨졌다. 스스로가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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