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에 있는 ‘뮤지엄 산’은 이름 그대로 산속에 자리 잡은 미술관이다. 구름 아래에서 산바람을 맞으며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니,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설레었다. 게다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안도 다다오가 총설계를 맡아, 공간 자체도 멋질 거라는 기대도 컸다.
2015년, 세 살과 여섯 살 아이 손을 잡고 먼 거리를 마다치 않고 방문했다. 정말 좋았다. 미술관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싼 근육질 산들, 아이들과 천천히 걸어도 힘들지 않게 조성된 산책로, 건물을 감싸고 있던 투명한 물, 수면에 비친 산 그림자까지. 그날 찍은 사진을 아이들과 함께 보며, 두고두고 추억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2020년, 한 일간지 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 뮤지엄 산
‘뮤지엄 산’의 건축 미학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홀린 듯 클릭했다. 2020년이면 코로나가 한창이었으니, 아마도 관람객 감소 탓에 홍보성 기사를 낸 듯했다. 기사에는 ‘뮤지엄 산’이 제공한 홍보사진이 실려있었다. 미술관을 한눈에 담은 항공사진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아이들과 함께 만든 추억이 눈앞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었다. 분명 내가 다녀온 곳인데도 너무나 낯설었다. 기사 속 사진은 원주 지정면의 구룡산 자락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봉우리 꼭대기에 자리 잡은 미술관의 모습이 어쩐지 섬뜩하기까지 했다.
마치 산의 등뼈를 따라 외과 수술 가위로 도려낸 뒤, 상처를 억지로 벌려 미술관 건물을 끼워 넣은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직접 방문했을 땐 실감하지 못했던 건물 형태가 항공사진으로는 한눈에 들어왔다. 미술관 건물은 양옆으로 뾰족뾰족 날이 서 있어서 마치 주변 나무를 찌르는 모양새였다.
2015년에도 ‘뮤지엄 산’이 해발 275m 산 정상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말은 곧, 둥글고 완만한 능선을 마구 파헤쳐 7만1172㎡나 되는 평평한 부지를 조성한 뒤, 시멘트 건물을 세웠다는 뜻이었다. 또 ‘물을 이용해 건축물 그림자를 드리우는 효과를 낸다’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 철학도 알고 있었다. 이는 곧 산을 깎고 땅을 판 뒤 엄청난 양의 물을 끌어와 건물 주변에 채웠다는 의미였다. 늘 다른 시각,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봐야 하는데... 내 깨달음은 늘 뒤늦게 도착하는 게 문제다.
기후 위기, 대기와 수질 오염, 자원고갈, 넘쳐나는 쓰레기, 산림벌채와 개발 확장으로 인한 생물 다양성 감소… 이 모든 것들이 인류 존속을 위협하는 우리 시대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바쁜 일상에 매몰되다 보면 이 환경 문제가 피부에 거의 와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환경까지 신경 쓰는 것은 좀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이 귀찮음은 ‘과학이 발전하면 미래세대가 환경 문제도 어떻게든 해결해주겠지’라는 무신경한 합리화로 이어진다.
▲ 테이프 서울(Tape Seoul)
2017년, 오스트리아 출신 3인조 그룹 ‘뉴멘/포 유즈(Numen/For Use)’의 설치작품을 보러 서울 압구정의 한 미술관에 갔다. 이들은 관람객이 작품 안으로 들어가 직접 놀 수 있는 거대한 설치물을 만들기로 유명하다. 그들이 미술관 로비에 설치한 반투명 조형물은 마치 스파이더맨이 만든 대형 거미줄 같기도 하고 거대한 애벌레가 사는 고치 같기도 하다. 실제로 뉴멘/포 유즈는 거미 등 곤충들이 집을 짓는 방식을 참고해 재현했다고 한다.
하지만 뉴멘/포 유즈가 유명해진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다. 이 거대한 통로를 만든 재료가 바로 ‘3M 스카치테이프’였다는 사실! 201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된 ‘테이프만으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동굴을 만들겠다’는 이들의 프로젝트는 이후 파리, 베를린, 스톡홀름, 멜버른, 도쿄로 이어졌고 그때마다 비슷한 작품을 새로 만들며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2017년, 드디어 서울에 입성한 뉴멘/포 유즈는 무려 540개의 투명 테이프를 감아 ‘테이프 서울(Tape Seoul)’을 만든 것이다.
남편과 아이들을 이끌고 ‘테이프 서울’ 앞에 선 순간, 마치 외계생명체를 보는 것 같았다. 미술관 측에서는 “테이프로 만든 것이다 보니 4명씩만 들어갈 수 있다”고 안내했다. 얼음 통로처럼 보이는 공간 속을 기어 다닌 경험은 신선했다. 한껏 신이 난 나는 SNS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테이프 작품이라 출렁거려 스릴 만점”, “좁은 통로를 기어가듯 다녀서 땀나고 운동도 된다.”, “처음엔 무너질까 봐 무서웠지만, 택배 보낼 때마다 느낀 테이프의 위력을 믿는다.”
반응은 ‘신기하다’, ‘재밌는 시도’라는 호평 일색이었다. “저만한 구조물을 만들려면 테이프 수천 롤은 써야 하는 줄 알았는데 540개로도 가능하다니 놀랍다”는 댓글도 있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 댓글을 본 순간, 김이 팍 샜다. “새롭긴 한데, 쓰레기 걱정이 좀 되네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관점이었다. 작품을 만들 때마다 썩지도 않을 플라스틱 쓰레기가 엄청나게 쏟아질 터였다. 한번 만든 작품을 다른 장소로 그대로 옮기기도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으면서도 나는 어쩐지 배배 꼬인 마음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창작활동을 아예 못하지. 환경을 위해 가장 좋은 건 인간이 아예 태어나지 않는 거고,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거지!’ 부루퉁해진 표정으로 대댓글을 달았다. “인간사 살아가는 게 다 그렇죠. 발길 닿는 곳마다 쓰레기를 생산하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그 댓글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 나는 깨달은 것이다. 댓글 속 지적을 인정할 때 나 자신이 감수해야 하는 마음의 불편과 재미의 손실을 감당하기 싫었다는 것. 그래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지구엔 해로운 작품이라는 진실을 손쉽게 외면했다는 것. 나는 그 작품을 깊은 생각 없이 좋아했던 나 자신을 정죄하는 게 싫던 것이다.
혹자는 미술에까지 ‘(환경)이데올로기’를 덧붙이냐며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을 대가로 만들어진 것이냐는 점이다. ‘뮤지엄 산’이 아름답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테이프 서울’이 예술적 가치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아름다움’이 자연파괴와 무분별한 개발, 재활용도 어려운 엄청난 플라스틱 쓰레기라는 ‘인간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과연 예술과 환경파괴는 무관한 것일까? 오히려 ‘둘은 따로 봐야 한다’는 관점 자체가 더 위험한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뮤지엄 산'을 소개한 기사의 항공사진을 보았을 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산의 능선을 훼손한 모습이 분명히 담겨 있었음에도, 그것이 '건축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환경에 대한 감수성이 충분히 반영된 것인지 되묻게 했다.
미술관에 가면 우리는 종종 헐벗은 여성, 장애인을 희화화한 그림, 흑인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옛 작품을 만난다. 지금 우리 눈에는 ‘차별적’으로 보이지만, 당대에는 누구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정상적이고도 일상적인 그림이었을 테다. 자연을 볼모 삼아 만들어진 작품과 건축물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훗날에는 ‘빌런’ 취급을 받지 않을까?
오랫동안 자아를 성찰하고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한 덕에, 예전엔 비장애 백인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졌던 여성·장애인·흑인 등 ‘타자’들이 점차 제 자리를 되찾아가고 있다. 이제 ‘타자’의 범위를 생명을 가진 모든 동식물로 확장해, 함께 지구에서 살아가는 동반자로 인정해야할 시점이 아닐까 싶다.
고백하자면, 오랫동안 나는 형형색색의 불꽃놀이를 아주 좋아했다. 그랬기에 불꽃놀이 과정에서 배출되는 미세먼지와 발암물질이 환경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한때 제주의 ‘새별오름 들불 축제’ 관람을 애타게 소망했던 적도 있었다. 어둑한 밤, 산 전체를 태우는 거대한 화염이 장관이라고만 생각했지 그 안에서 타들어 가는 생명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흙에다 시커먼 기름 휘발유를 먹이고 불을 놓으면 그 안에 살던 곤충, 파충류, 새들은 재앙을 맞는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사랑했던 들불 축제도 마음에서 놓았다. 말과 행동, 생각을 조금씩 바꿔나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윤리적 주체’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매일 ‘다른 존재’의 편에 서서 생각해보기, 미래세대의 눈높이에 맞춰 주위를 살피기,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이 대상에 내가 사랑하는 미술관과 예술작품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