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시간>은 영국에서 총 4부작으로 제작돼 2025년 전 세계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영국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13세 소년 제이미가 같은 학교 여학생 케이티를 살해한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문제적 환경과 대면하려고 한 시도로 화제를 모았다.
그 환경은 통칭 ‘매노스피어manosphere’, 즉 ‘현대 남성성 및 여성과의 관계 문제로 의견을 표현하며 특히 페미니즘과 여성 권리에 적대적인 견해와 관련된 웹사이트 및 블로그’에서 공유되는 것들과 관련되어 있고 그중에는 ‘인셀incel’ 커뮤니티도 있다.
인셀이란 여성과 연애를 못할 거라고 믿는 남성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로, 여성혐오, 자기연민, 왜곡된 젠더의식 등이 깔려있다. 말하자면 인셀은 자신을 유전적인 열등함이나 불공정한 사회 체제 등에 기인한 일종의 낙오자로 규정하는데, 왜곡된 규정 속에 생기는 박탈감은 여성들이 자신을 불공정하고 부당하게 대하며 무시한다는 식의 피해의식, 나아가 여성을 증오하는 감정 등과 연결되어 있다.
<소년의 시간>에서 펼쳐지는 내용은 단지 실제 폭력 사건의 차용이나 극단적으로 상상된 허구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 문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를 지닌다. 제이미는 아버지를 무척 따르고 의지하는데, 그는 운동을 못하는 자신을 외면하는 아버지의 시선을 감지하고 있다.
아버지의 생일 아침에 가족들은 제이미와 가족들에게 낙인을 찍듯 차에 락커로 쓴 갈겨 쓴 험한 말을 보는데, 아버지가 감정을 억누르는 중에 가족들을 통솔하는 때나 혹은 참지 못할 분노를 표출하는 때에 느껴지는 그의 모습은 때로 낙서보다도 더 긴장감과 위압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제이미의 사건으로 학교를 조사하는 형사가 제이미의 친구 라이언을 만났을 때 라이언은 그 단단한 근육질의 경찰 신분 남성에게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거란 인상을 받는다.
우리는 시리즈 전반에서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강함’이 대상을 제압하는 강압이나 우월감 같은 것으로만 상상되는 사회 문화적 인식에 따른 강한 남성성의 문제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여기서 더 중요하게 문제가 되는 점은 왜곡된 강한 남성성을 기준으로 우열을 비교하고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이 SNS라는 새로운 소통 체계 안에서 인셀 커뮤니티와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면서 여성 혐오를 업데이트하고 확산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4부작 각각을 ‘원 테이크one take’로 촬영한 효과로 나타나는 몰입감 속에서 관찰된다. 원 테이크란 특정 장면을 찍을 때 컷을 나누지 않고 한 번에 찍는 기법을 말한다. 이 시리즈는 2편에서 창문을 넘어 달아나는 학생을 따라가는 한 곳에서만 후반 작업으로 컷을 이어 붙였을 뿐 나머지는 에피소드별로 원 테이크로 촬영한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년의 시간>은 원 테이크 카메라의 지속 시간 속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연속적인 공간에 관객을 초대하고, 관객은 카메라의 궤적을 따라 실시간의 감각 속에서 그려지는 세계에 현장감을 느끼며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첫 에피소드부터 관객은 주인공에게 무언가 억울한 일이 있어서 진실이 파헤쳐지겠다는 익숙한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CCTV가 부인하기 힘든 명백한 증거 영상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시리즈는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범인이 누구인가에 관한 물음 대신 범행에 이르기까지의 이유를 향한 물음에 집중한다.
둘째 에피소드의 무대가 되는 사건 발생 3일 후의 학교에서 선생은 학생의 세계를 모르고 학생들은 그러한 기성세대에 일말의 기대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른 채 학교를 휘젓는 형사를 아버지로 둔 학생만이 아버지의 무지가 창피하다며 자기 세대에 관해 설명한다.
이때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인셀, 그리고 청소년들이 주고받는 이모티콘 기호의 구체적인 의미들이다. 케이티와 제이미는 끊임없이 타인을 의사와 별개로 노출하고 재단하는 시선에 둘러싸여 있다. 케이티의 노출 사진이 공개됐고, 제이미는 이 사건으로 케이티를 위로하기보다 그녀를 만만하게 상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 봤으며 그녀는 이런 제이미의 접근을 거절하고 그를 인셀로 낮잡았다. 이때 SNS라는 소통 미디어는 진솔한 마주침 대신 지배적 시선에 의해 왜곡된 반응을 폭증시키는 도구다.
범죄 발생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에 보호 센터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제이미를 보여주는 셋째 에피소드에서 제이미는 상담사와의 대화 과정에서 그녀를 비웃거나 위협하면서 관계의 우위를 점하려고 하지만, 이런 모습은 그의 인정 투쟁과 부서질 것만 같은 약한 자존감을 노출할 뿐이다. 자신이 추해서 케이티가 SNS에서 자신을 낮잡는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제이미에게서는 자신의 폭력으로 인한 피해자의 죽음을 실감하거나 현실감 있게 대하는 태도 대신 도리어 피해자를 나쁜 인물로 확인받고자 하는 모습만 발견된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 가족을 다룬 마지막 에피소드에서야 아버지에게 생일 축하 전화를 건 제이미의 목소리를 통해 그가 유죄를 인정하기로 한 결심을 듣게 된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나 아버지를 따라 스포츠를 하면서 손을 놨던 제이미가 이 시기에 직접 아버지 얼굴을 그린 생일카드를 보낸 일은 뒤틀린 자의식을 벗어내고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있는 과정으로 유추될 수 있을까?
시리즈를 보면서 시간차를 둔 네 개의 현장에서 다양한 현실을 목격하지만, 에피소드들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극은 현장들을 응집력 있게 연결하는 고리를 무력화한다. 그것은 마치 CCTV의 증거가 너무도 명백한 사실과 그 사실을 산출한 맥락의 비가시성이 동시에 작용하는 이미지로서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 것에서도 반복된다.
이는 이모티콘이 공통의 기호로서 지시하지만 동시에 그와 대조적으로 현시대의 은어처럼 작동하면서 이중적인 이미지로 작용하는 것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소년의 시간>의 몰입감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이 그것을 한정된 시점으로 만드는 시리즈 전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 같다. 관객을 붙잡아두는 지속의 감각 속에서 우리가 결국 실감하는 것은 그 시간에 대한 우리의 무지가 아닐까? 이는 제작진의 의도 여부와는 별개의 물음일 것이다.
이 물음은 결국 우리가 실감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이 도달하는 마지막 장면, 자신의 부족함과 직면하는 아버지의 오열에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또 작품이 주는 몰입감을 칭찬한다면 그것이 쾌감 대신 계속되는 당혹스러움을 견디도록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유려하게 여기저기 누비는 시선에도 완벽히 해석되거나 포착되지 않고 산개해 있으면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위압적인 문화의 그늘, 더불어 그것들을 확산하는 문화 앞에서 서 있다.
그것이 원 테이크로 지속하는 카메라가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 시대의 시간임을 기억하고, 아버지가 오열하면서 독백하는 “좀 더 잘했어야 했다”는 말을 함께 겪어내면서 그 모르는 시간을 이해할 과제를 짊어지도록 하는 것이 <소년의 시간>의 카메라가 그 역할을 다해 이뤄내는 체험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