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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을 해체하는 바깥을 향해 보내는 미소

<콘클라베>(2024)

등록일 2025년05월09일 13시24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채희숙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4월 21일에 선종하였다. 그는 4·16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유족을 방문하고 거기서 받은 노란 리본을 계속 착용한 채로 일정을 소화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는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교황이 영향력을 발휘한 행위로서 종교 유무를 떠나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곧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전 세계 추기경들의 모임인 콘클라베가 열릴 것이다. 어디로 자신의 발걸음을 옮기는 이가 다음 교황으로 선출되어야 할까.

 

근래 개봉한 <콘클라베>(에드워드 버거, 2024)에서 로렌스 추기경은 존경하던 교황의 선종 후 열리는 콘클라베를 운영하는 관리자 역할을 맡게 되는데, 모임의 모두 발언을 하는 자리에서 “의심하는 교황을 보내주십사 기도합시다”라고 제안한다. 확신은 관용의 가장 큰 적이며 신앙이 살아 있는 이유는 의심과 손을 잡고 걷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심은 로렌스 스스로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기도를 드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로렌스가 기도를 드릴 수 없는 것은 말을 건낼 신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일까? 그럼 관용의 적인 확신 대신 의심이 필요하다고 할 때 그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지? 미궁 속에 있는 물음을 품고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밀실에서 사건을 푸는 미스터리 수사물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죽은 교황의 행보와 추기경들의 면면, 투표의 향방, 무엇보다 콘클라베라는 모임의 성격 자체로 이 영화는 비밀로 둘러싸여 있는 세계의 드라마가 되고 로렌스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비밀의 관리자가 된다.

 

영화는 바삐 걸음을 옮기는 로렌스의 뒷모습을 따라가면서 시작하고 그가 교황청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단 한 걸음도 한 시선도 교황청 외부로 향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내부의 문제다. 콘클라베는 철저한 보안하에 있어야 하기에 창의 진동을 이용한 도청을 막는 공사가 치러지고 뉴스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콘클라베는 한 추기경에 과반수 투표를 할 때까지는 끝나지 않기에 일정 기간 거의 완벽한 밀실, 외부와의 소통이 일절 차단되는 폐쇄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교황청과 콘클라베 의식을 잘 재현한 공간이나 미술에서도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공간과 의상과 소품 등등이 자아내는 오차 없이 정돈된 분위기는 상당한 시청각적 쾌감을 주기도 하는데, 누군가가 완벽히 통제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이러한 종류의 것일까?

 

 
그러나 밀실도 통제의 아름다움도 결코 유지되지 못한다. 로렌스를 대신해서 바깥을 오가며 일종의 밀사 역할을 하는 오말리 몬시뇰은 계속 로렌스에게 외부 소식을 가져오고 그것은 매번 밀실에 균열을 낸다. 투표는 스캔들과 부패가 밝혀지며 계속 방해를 받는다.
 
그런데 밀실을 파괴하는 것은 우연히 호기심 가득한 밀사가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테러가 발생해 투표 테이블에 진동을 만들면서 외부를 환기한다. 또 밀실의 거의 모든 곳에 출몰하며 중요한 곳곳에 버티고 서있지만 그 존재 자체가 외부라고 할 수 있는 수녀들이 있다.
 
수녀들이 있는 한 밀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콘클라베를 지키면서도 어떤 결정권이나 의견이 허락되지 않는 존재로, 밀실 결정의 행위자나 공범자 또는 수혜자가 전혀 아니다.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는 수녀들의 존재는 언뜻 밀실의 수호자 같지만, 실제로는 밀실의 불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이러한 위상은 콘클라베의 수녀들을 이끄는 아그네스 수녀를 중심으로 드러난다.
 

 

밀실이 해제되는 세 번의 결정적인 장면에는 로렌스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로는 로렌스가 미심쩍은 일을 알아보려고 결국 교황의 선종 이후 봉인된 방의 밀랍을 떼고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봉인된 공간 너머에서 그는 비밀 속에 있던 부패의 진실을 밝힐 증거를 발견한다.

 

둘째 장면은 로렌스가 투표용지를 넣는 순간 꽁꽁 막았던 유리창 벽면이 테러의 충격으로 부서져 버리는 장면이다. 이 사건은 로렌스조차 생각하고 있지 않던 인물인 베니테스를 교황으로 추대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베니테스는 마지막 밀실을 여는 장면의 열쇠이기도 하다.

 

 

베니테스가 교황이 된 것은 테러로 부서진 벽의 먼지를 뒤집어쓴 추기경들이 논쟁을 벌이는 중에 그가 한 연설 때문이다. 그는 모두에게 묻는다. 우리의 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말한다. 적은 바로 우리 내부에 있다고. 외부를 완전히 차단하고 완벽히 통제된 자기 확신 아래 신의 최고 대리자인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는 바로 폐쇄성과 함께 잘못을 묵인하고 사장하는 곳이다.

 

반면 밀실에 나는 균열을 감수하고 비밀을 풀려고 바깥의 힘을 빌릴 때 콘클라베는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베니타스가 로렌스에게 고백하면서 여는 마지막 비밀이야말로 위의 모든 전개를 훌쩍 넘는 차원의 것이다. 이를 언급하는 것은 결정적인 스포일러 누설이지만, 비밀의 공유는 깜짝 놀라는 일보다 훨씬 중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교황 선출 직후 오말리에게서 베니타스가 방문하려다 취소한 클리닉의 성격을 들은 로렌스는 베니타스에게 그것에 관해 묻고 베니타스는 자신이 성인이 되고서 뒤늦게 ‘간성’임을 알았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간성이란 이분법적인 성별로 구분이 불가능한 성적 특질을 지닌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많은 경우 스스로가 자신을 인지하고 결정할 수 있기 전인 어린 시절에 부모와 의료진의 결정에 의해 신체를 변형하는 수술을 받게 된다고 한다.

 

베니타스의 경우 외적으로는 식별할 수 없이 몸 안에 자궁을 갖고 있었기에 성인이 되어서 알게 된 자기 몸에 대해 결정권을 가질 수 있었고, 그는 신이 주신 몸을 자신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음을 로렌스에게 고한다. 몇천 년에 걸쳐 작동하고 있는 폐쇄성,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 속에 밀실처럼 갇혀있는 몸은 실은 언제나 의심받아야 마땅한 불확실한 것으로 존재해왔고, 이 미스터리 수사물은 신과 가장 가깝다고 여겨질 만한 교황의 몸을 통해 밀실의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바로 이 마지막 열린 공간, 베니타스의 몸만큼은 비밀로 묻어두었고, 로렌스는 비밀의 문을 열기보다는 그것을 닫는 이가 아닌가 반문할 수 있겠다. 실제로 베니타스의 비밀이 공개되지 않는 영화의 마무리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의 한계이자 영화란 것이 언제든 편리하게 멈춰설 수 있는 지점, 또한 우리가 선뜻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을 가두는 벽의 모습이라고 고백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렌스가 재잘거리며 나가는 수녀들의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짓는 엔딩 장면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던진 미스터리는 이미 알고 있던 것 너머를 감지하고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욕망으로서의 의심이었다. 존재 그대로를 받아 안은 베니타스에게 의심을 넘어서 충만한 삶이 자리하고 있음을 안 로렌스는 이제 막 의심이 자기 한계에 기인함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확신을 한계로 만드는 간성의 베니테스를 마주하고, 그동안 존재를 몰랐던 수녀들이 폐쇄된 교황청을 바깥으로 여는 새벽의 활기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아챈 로렌스가 비로소 신적인 것과 마주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면 신성모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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