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근로기준법의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의 적용을 제외하자고 주장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를 필두로 반도체 사용자들은 속도와 창의성이 경쟁력인 반도체 시장에서 밤샘 연구를 통해 기술 개발과 오류수정을 통해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는데 주 52시간제가 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2023년 윤석열 정부가 1주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근로시간의 정산단위를 변경 시도한 것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기업의 주 52시간제 손질 요구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긴 어려웠다. 삼성 등 반도체기업의 경쟁력 약화는 노동시간의 규제보다 인공지능(AI) 기반의 기술 발전에 따른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수요 증가 등 변화하는 반도체 시장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경영진의 무능 때문이라는 지적도 반도체 경쟁력 위기의 핵심이 노동시간이 아니라는 점을 잘 증명한다.
그런데 갑자기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 산업의 노동시간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재명 대표의 더불어민주당이 논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표는 거대 야당의 당대표로 차기 유력한 대권후보다. 윤석열의 반헌법적 비상계엄으로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확정된다면 이재명 대표가 차기 대통령으로 한국의 노동정책을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가 경제와 민생을 챙기겠다며 새해부터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동시간 논쟁에 적극 뛰어든 것이다.
노동자·서민에 대한 언급 없이 기업의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임을 강조했던 이재명 대표의 신년 기자회견 내용을 접하고 노동계가 친기업 우클릭이라며 경계감을 드러내던 시점이었다. 양대 노총은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장시간 노동을 철폐하고 주 4일제를 추진하겠다던 이재명 대표가 반도체특별법 관련 정책 토론을 직접 개최하는 등 국민의힘과 대기업 경제단체의 요구에 “부화뇌동하며 군불을 때고 있다”고 날 선 비판을 내놨다.
노동계는 우려하지만 사실 노동시간에 대한 이 대표의 적극적 정책 수렴 활동은 반가운 일이다. 윤석열의 내란 행위가 잠식한 정치적 난제를 푸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하는 방식에 대한 제도개선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입법에 큰 영향을 미치는 다수당과 유력 대선후보가 직접 나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노사의 의견을 수렴하고 합의점을 모색하려는 노력은 오랜만에 갈등을 조정해 대안을 도출하는 정치의 기능이 복원되는 과정으로 박수받을 일이다.
그러나 지난 3일 이재명 대표가 좌장을 맡아 노동계와 반도체기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더불어민주당 정책 토론 <행복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반도체 특별법 노동시간 법 적용 제외 어떻게?>에서 나타난 더불어민주당의 반도체산업을 비롯한 첨단기술산업 노동자에 대한 노동시간 규제 입장을 보면서 다소 실망감이 들었다.
이재명 대표는 반도체특별법을 통한 노동시간 규제 제외라는 논쟁의 역사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대표는 반도체산업의 발전을 위해 일부 고소득 연구개발직 노동자에 대해 자발적 동의를 전제로 한시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노동계가 반대하는 것을 답답해 했다. 그러나 재계와 정부·여당의 노동시간 무력화 목표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11월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이재명 대표를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를 초청해 연 간담회에서 요구한 사항은 반도체산업 노동자에 국한된 것이 아닌 산업 전반의 노동시간 유연화(연장근로 정산단위 변경 등)였다. 이른바 문재인 정권에서 확립한 주 52시간제의 기본틀을 허무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삼성전자 사장 출신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이 주도해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반도체산업만이 아니라 바이오·디스플레이·이차전지를 비롯한 첨단산업 연구개발 직종으로 노동시간 규제 대상의 확대를 목표로 했다. 여기서 끝일까. 그다음은 주 52시간제로 연장수당이 줄어든 저임금 노동자들을 앞세워 중소기업주들이 주 52시간제 폐지를 요구할 것이다. 이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은 감당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