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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겨내는 간명한 미학

<룸 넥스트 도어>(2024)

등록일 2025년03월10일 08시46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채희숙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룸 넥스트 도어>(페드로 알모도바르, 2024)는 소설 『어떻게 지내요』(시그리드 누네즈, 2021)를 각색한 영화다. 각색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소설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만 의존하는 영화라면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를 따라가지 못해 작품이 성기고 허전해진다.

 

원작에 감동을 받은 많은 경우에 작품에서는 전과 같은 감흥을 다시 얻지 못해 실망하고 만다. 그런데 위 두 작품은 같은 테마 안에 있지만, 영화가 소설과 같아지려 하기보다는 소설이 준 영감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면서 혼자 바로 서려고 했기에 하나보다는 둘이어서 더 좋은 흔치 않은 경험을 선사한다.

 

덕분에 독자이면서 관객이 되는 사람들은 위 작품들의 테마라 할 수 있을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삶의) 태도’에 관해 더욱 깊이 있고 풍부한 생각을 해나갈 수 있다.

 

잉그리드는 오랫동안 연락을 못 나눈 친구 마사가 암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가면서 그녀와 재회한다. 그런데 마사의 말동무가 돼주던 잉그리드는 곤란한 부탁을 받게 된다. 항암치료에 실패하고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마사는 점점 고통에 압도되어 마음과 정신의 통제를 벗어나게 될 날들을 거부하고 안락사를 도모하는데, 죽음으로의 여정에 잉그리드가 동반해주기를 요청한다.

 

“내게 필요한 건 나와 함께 있어 줄 사람”이란 그 요청은 실용적인 것을 위한 게 아니며 자신이 임대해 기거하게 될 방의 옆방에, 어느 날 자신이 맞이할 죽음의 날까지 묵어달라는 것이다. 작품들의 배경인 뉴욕에서 안락사는 불법이므로 마사의 요청은 잉그리드에게 공범자가 되어달라는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잉그리드는 마사와 함께 경험하게 되는 “이 모든 것”, 소설에서 표현한 대로 “이 모든 것: 가차 없는 것,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충실히 겪어내기 위해 애쓴다.

 


 

우선 소설은 시작점에 인류의 가망 없음을 설파하는 옛 연인의 강연을 다룬다. 그 핵심은 인류의 이기심과 무책임함으로 인해 망가져 버린 이 세계가 더는 회생 불가능하며,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인류에게 마지막 남은 진실한 성찰이라는 것이다. 잉그리드는 화자로서 주변의 이야기들을 기억하며 인류에게 닥쳐있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마사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함께 사유한다.

 

외모에 대한 불안에 몸과 마음이 상해버린 여인, 계속 걸려오는 스팸 전화를 상대하다가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쌓게 된 할머니, 자신이 불치병에 걸리자 남편이 이를 기뻐하고 있음을 눈치챈 중년의 여성 등등의 이야기. 그 이야기에는 통제할 수 없는 삶의 면면들이, 그 속에서 사람들이 각자 겪는 고통을 서로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일의 어려움이 담겨있다.

 

잉그리드가 새로 만난 헬스 트레이너는 시한부 진단을 받은 친구 때문에 괴로워하는 잉그리드의 사연을 듣고 위로의 포옹을 해주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고객의 운동 트레이닝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는 신체를 직접 잡아주는 일이 중요하지만, 스킨십이 낳을 수 있는 시시비비의 상황에 대비하여 이제 고객과의 신체 “접촉”이 전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트레이너는 뒤돌아 가던 발걸음을 잉그리드로 되돌려 그녀를 안아주는 것을 택한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어떻게 지내요?”라는 안부 인사 역시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마음에 닿기 위한 노력으로서 일종의 접촉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 안에서 프랑스어와 영어 간 의미 차이를 말하는 방식으로 이 문장의 의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전달되는데, 이 말은 프랑스어에서는 “당신의 고통은 무엇입니까?”가 된다.

 

소설의 잉그리드는 “죽어라 애쓰고 죽어라 계획해 봐야”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인간의 삶을 확인하면서 그렇기에 더욱 이 가차 없고 형언할 수 없는 삶에서 얻는 각자의 고통을 나누는 “접촉”이 중요함을 말한다. 이는 옛 연인이 인류에게 가망 없음을 선고한 것에 대한 하나의 진솔한 반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실패를 앞두어도 지켜야 할 일에 용맹하게 애쓸 것, 마사가 죽음 앞에서 노력하는 것처럼, 마사에게 배우고 마사를 이끌기도 하는 접촉 속에서 애쓰는 힘을 지킬 것.

 

영화에서는 그 힘의 이름이 바로 삶이라고 전하는 것 같다. 영화의 마사는 주로 작품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으며, 여기서 잉그리드는 화자라기보다는 듣는 사람이다. 또 소설에서 잉그리드가 관찰하는 역할에 가깝다면 영화에서 잉그리드는 우리에게 관찰되는 인물에 가깝다.

 

그래서 소설에서의 잉그리드가 내면 깊숙이에서 건져 올리는 생각을 말한다면, 영화에서의 잉그리드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그에 반응하고 움직이는 행동을 보여 준다.

 

 

잉그리드는 죽음이 두렵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계획대로라면 마사가 어느 날 스스로 안락사를 실행하게 될, 즉 죽음이 곧 찾아올 방 옆에서 그것을 직면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잉그리드는, 죽음이 삶의 찬란함을 해치지 못하도록 마지막 용기를 내려는 마사의 곁을 지키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낸다.

 

마사와 잉그리드는 숨겨진 이면을 의심하는 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기꺼이 감흥하며 그들의 시간을 정직하게 보내고, 마사와 잉그리드가 죽음을 직면하는 그러한 태도에 조응하듯이 영화 전체는 흐트러짐 없는 구조와 다채로운 색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번화하기보다는 간명하게 다가온다. 그 간명한 미학은 죽음 앞에서 용맹하게 삶이 지닌 긍지와 위엄을 지키는 태도야말로 삶 자체라며 예술로 마사와 잉그리드에게 찬사와 지지를 보낸다.

 

소설과 영화의 서로 다른 초점이 있다면, 마사와 딸의 관계를 마무리하는 부분을 짚을 수 있다. 소설에서는 “딸과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내[마사]가 화해”하는 것으로 모녀의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야기가 멈추지 않는다. 딸이 엄마에 대해 모르고 있는 이야기, 그래서 엄마를 부당하게 미워한 이야기를 잉그리드가 딸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소설이 통제 불가능하고 모순적인 현실을 부단히도 살아내는 우리 각자들의 고통을 ‘현실’로서 그 자체로 껴안으면서 죽음을 겪는 용기를 말한다면, 영화는 한 인간의 생명이 다한 뒤에도 ‘이야기’를 통해, 다시 말해 예술에서 계속되는 삶을 보여주며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의 어느 한 부분에는 윌리엄 포크너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당대의 젊은 작가들이 “가슴이 아니라 분비선에 대해 글을 쓴다”는 말을 인용한다. 반대로 하면 글이란 분비선이 아니라 가슴을 보여줘야 한다는 관점을, 이 소설에서는 실패보다는 애쓰는 마음을 서로 접촉하자는 자세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영화는 소설의 다른 부분에 인용된 “거기 당신은 없는 모든 시간이. 그리고 영원히 존재할, 세상이 한없이. (조이스.)”라는 말을, 이야기와 예술을 통해서 삶은 죽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고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윌리엄 포크너와 제임스 조이스를 따라, “어떻게 지내요?”라고 물으며 “룸 넥스트 도어”에 머물면서, 우리는 홀로 각자의 방을 가진 독자적이고 외로운 존재들이고 결국 홀로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바로 옆방에서 지속되는 삶과 함께 한없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게 필요한 건 나와 함께 있어 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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