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애란 작가의 단편 소설들을 읽었다. 나보다 몇 살 많은 언니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안에는 2000년대 초반 노량진을 거쳐 간 20대의 모습부터, 30대와 40대가 되어 마주한 현실이 강렬한 문장으로 새겨져 있었다. 동시에, 1980년대생들이 사회에 진입하며 겪어야 했던 한국 사회의 기록이기도 했다.
“그곳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7년이 지난 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 걸까” - <자오선을 지나갈 때> (2007)
<자오선을 지나갈 때>의 주인공은 지방 출신으로, 서울 노량진 학원에서 재수를 하며 20대를 시작한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결국 노량진에서 학원 강사로 일하며 여전히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지나가기만’ 할 줄 알았던 공간이 어느새 머물러야 하는 곳이 되고 만 거다.
80년대생들에게 2000년대 후반은 본격적인 고난의 시작이었다. IMF 사태로 많은 가정이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그 와중에 어렵사리 대학에 입학했지만, 졸업 후에는 이전 세대와 달리 안정된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의 파견법 개정과 기간제법 도입으로 비정규직이 급증한 데다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일자리 자체가 사라지던 때였다. 국가장학금 제도도 없어 기본 2~3천만 원의 학자금 대출의 빚을 지고 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벽에 부딪혀야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의 모습을 담은 <서른>에는 이런 현실을 살아낸 이들의 내면을 뒤흔드는 문장이 등장한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 <서른> (2011)
아무리 애를 써도 겨우 나 하나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운 현실. 사회 구조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장벽이 되어버린 시대, ‘노력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절망감이 자리 잡는다. ‘겨우 내가 될 텐데’라는 말 속에는 희망 없는 삶에 대한 체념, 그래서 새로운 생명을 이 세상에 맞이할 자신이 없다는 두려움이 담겨 있다. 초저출산 국가가 된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렇게 버티며 살아가던 주인공은 <입동>에서 또 다른 ‘사회적 참사’를 마주한다. “명의만 내 것일 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닌데도 그랬다. 이십여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이제 막 어딘가 가늘고 연한 뿌리를 내린 기분”으로, 처음으로 안정된 삶을 꿈꾸던 순간,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사고를 겪는다. 세월호 참사를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조차 한국 사회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80년대생 이후의 세대들에게 소설 속 이야기는 공감이 되면서도, 더 고난이 깊어진 현재 상황 때문에 감흥이 적을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사회 안전제도가 사라지고 양극화가 급격히 심화되는 상황을 가장 먼저 온몸으로 맞이해야 했던 80년대생들을 기억한다는 건, 지금 우리가, 그리고 내가 어떤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새롭게 인식하는 지점이 된다.
우리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를 아는 것은 결국 지금을 이해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김애란의 소설은 그저 한 세대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나온 시간과 그 안에서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김애란의 단편소설 <자오선을 지날 때>가 실린 <침이 고인다>와 <서른>이 실린 <비행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