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민사회가 2024년을 평가하고 2025년을 전망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1월 8일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노동·시민사회 사회정책 분야 2024 평가와 2025 전망 포럼’에서 정책 분야별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긴 시간 토론을 통해 사회정책에 있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대해서 논의했고 현장에는 활동가뿐만 아니라 석·박사 과정의 예비연구자들이 다수 참여했다. 본고에서 현장에서 논의된 내용을 정리하고 향후 우리의 과제를 밝혀본다.
▲ 1월 8일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노동·시민사회 사회정책 분야 2024 평가와 2025 전망 포럼’
연금과 의료, 돌봄 모두 총체적 난국이었던 2024년
2024년을 회고한 전문가들은 모두 총체적 난국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면서 한국은 국가의 힘이 강화되는 만큼 자본의 힘도 함께 커졌다. 이에 대항하는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의 역량은 상대적으로 더 강화되지 못한 부분으로 인해, 시민들에게 자본 이데올로기는 더욱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로 인해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인구전환, 디지털전환, 기후전환이라는 삼중전환의 환경 속에서 우리는 더욱 표류하고 있다.
생산과 분배구조의 시스템 전환이 쉽사리 가능한 상황도 아니다. 다만 계엄사태 이후 새로이 열릴 정치적 기회구조 안에서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희망은 남아있다.
특히 노동조합과 시민사회가 이 연대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정권이 교체된 결과가 실망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인지, 전환기 속에 시민들이 처할 ‘눈물의 계곡’을 함께 손잡고 넘어가기 위해서 복지국가의 확대는 당연히 필요하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윤석열 정부가 사회정책에 있어 시민에게 피해를 준 만행들이 평가됐다. 먼저 소득보장에서는 ‘연금판 쿠데타’ 혹은 ‘연금판 내란’이라 할 수 있는 세대별 차등 보험료 인상과 자동삭감장치 도입을 담은 연금 개악안에 대한 비판이 주요 내용이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연금개혁안을 발표하며 제도 내적인 수지균형에만 초점을 맞춰 거시경제적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공적연금의 사회적 부양이라는 제도적 목표 또한 상실된 문제를 드러냈다. 절차상으로도 공론화 과정을 통해 시민이 선택한 연금개혁의 방향을 담아내지 못하고 법 개정 절차마저 정부·여당이 제 발로 걷어찬 잘못된 사례라는 것이다.
이는 소득보장체계의 기본 자체가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한 것, 특히 소득보장제도를 통해 다수의 시민이 적정한 수준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데 실패한 과거에서 유래한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약자복지라는 정치적 수사를 통해 강자와 약자를 나누는 나쁜 정치를 정당화했고, ‘취약한 청년과 기득권 중장년’ 같은 대립을 부추기는 갈라치기 수사를 통해 시민들에게 거짓을 퍼뜨렸다.
돌봄 분야는 부적절한 정책수단, 서비스 대상 쪼개기, 구조개혁의 지체, 땜질식 시범사업, 재가족화 같이 현대 사회의 가구 및 개인들의 삶과는 조화되지 않는 정책들의 연속이었다.
아동 돌봄은 늘봄학교나 유보통합 등 재구조화 단계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안에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성인 돌봄은 지역사회 통합돌봄이라는 이름 아래 구체적으로 전반적 구조를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 서비스양 조정에만 집중하는 등 각개약진 양태만 보여왔다.
게다가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돌봄 노동자에 대한 처우도 동시에 개선되면서 전문역량을 강화해야 하는데 이런 부분에는 정부가 그동안 관심 자체를 갖지 않았다.
특히 돌봄 노동에 관련해서는 작년 ILO가 ‘돌봄 경제와 양질의 일자리 보고서’를 총회에서 채택함으로써 세계적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부불 노동에 대한 부담을 젠더 불평등에 나뉘는 오래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매우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와 같이 인구의 문제가 심각함에도 노동력 공급 측면, 재생산 측면에서 여성 노동인구가 완충(buffer)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참여, 여성이 받는 도움과 연결되는 돌봄 노동에 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다는 부분이 지적됐다.
의료분야는 의대 입학정원을 중심으로 출발한 ‘의료대란’이 해를 넘기는 등 여전히 산적한 문제들이 많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특히 지역사회 중심의 필수의료패키지가 지역불균등 발전에 있어 핵심적 사안인데도 여전히 책임이 큰 국가권력이라는 주체가 이에 손을 놓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보편적 이익과 공공복리를 위한 권력 자원의 배분, 전달체계의 공공성 강화라는 측면에서 국가가 다시 이에 대해 구체적 방안을 확립하여 시민들과 함께 손잡고 추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제도개혁의 뒤편에서는 공공의료의 약화로 인해 의료현장에 상업성이 무분별하게 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혁신 의료기기 등 의료현장에서 신기술이 진입하는 기간이 짧아지고, 개인의 건강정보가 상업적으로 이용되면서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이 확장되고 있다. 또한, 비대면 진료 확대라든가 민간보험사 연계 서비스가 많아지면서 결과적으로는 의료자본의 축적체계가 구축됐다.
이를 제어하기 위해 공공성 가치를 존중하는 관료, 공공성을 중요시하고 결과물을 내놓은 연구자, 이러한 가치가 확대되도록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시민사회가 일종의 연합전선을 형성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특히 의사 전문직과 국가권력이 독점하고 있음에도 별다른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아 왔던 점을 고려해, 기존 권력 구조를 해체하고 문제 중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작업을 추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 한목소리,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마지막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한 편으로는 노동·시민사회가 활동 범위가 넓어졌으나 상대적으로 힘이 위축되었다고 주장한 전문가도 있었고, ‘그래도 연금개혁 등 과정에서 싸워볼 만 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노동·시민사회가 함께 연대하고 중장기적으로 더 많은 역량을 투입하여 사회정책과 관련된 구체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활동을 계획하고 논의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노동조합에서는 단순히 사업장 단위의 임금 및 고용조건 개선이라는 당면과제를 벗어나 장기적으로 생산 및 분배구조의 전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해야 하고, 투쟁을 통해 조직적 성과로 남을 수 있도록 사업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또한, 과거만큼 노동·시민사회가 리더십을 갖기 어려워진 현실적 조건 속에서 다양해진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해 활동 범위를 대폭 늘리는 작업도 필요하다는 점도 제기됐다.
현장에 참석하면서 결국 양대 노총이라는 조직노동과 주요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시민 참여 사업들을 올해 전개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특히 사회정책과 같이 시민의 삶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점점 복잡해지는 정책환경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해야 하는 일들이 더 많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부담이자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가능성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좌장을 맡은 이태수 인하대 교수는 마무리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200만 넘는 조합원이 있는데 이런 정책 아젠다와 정치권의 움직임에 있어 어떤 리더십을 갖느냐는 매우 중요할 것이다. 지역사회 운동에도 직접 참여해야 할 것이다. 역사 속에서 사실 복지국가는 치밀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운동과 투쟁, 연대와 소통을 통해 한국노총이 시민과 함께 복지국가를 만드는 리더십을 가져야하는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