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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격대장, 이강년 

등록일 2018년10월16일 16시42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맥켄지가 사진으로 남긴 ‘조선인 반란군(Korean Rebels)’.


구한말 의병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인기리에 종영됐다.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주저없이 무기를 들었던, 돌아올 수 없는 길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행군에 나섰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병헌이 열연한 주인공 초이유진이 태어났을 무렵인 1859년 2월 경상도 문경군 가은면에서 이강년이 태어났다. 가은은 경상도에서 한양을 내왕하는 유일한 길목이었던 조령관문 밑에 자리한 교통의 요지였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집에서 자란 이강년은 기골이 장대하고 키가 여덟 자가 넘었다고 한다. 1880년 무과에 급제한 그는 선전관이 되었으나 1884년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당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민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정국이 혼란한 때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조선관군과 일본군의 연합작전으로 초토화되고, 1895년(을미년) 민비가 일본에 살해당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은 일본군 수비대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신의 안위를 도모했다.  


고향에서 기회를 엿보던 이강년은 의병운동에 동참하여 유격장이 되었고, 1896년 1월 일본군 병참이 있던 충주부를 점령해 관찰사 김규식을 처형하며 기세를 올리던 유인석 부대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1896년 4월 유인석 부대는 장기렴이 이끄는 조선관군과 일본군의 연합작전에 패하여 제천의 근거지를 잃게 되었다. 고종도 의병 해산을 종용하는 조칙을 내렸고, 그해 가을무렵에는 의병운동이 표면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강년은 유인석을 따라 중국 요동으로 건너갔다가 충청도 단양으로 돌아와 후일을 도모했다.  


1907년(정미년) 7월 24일 체결된 한일신협약에 따라 7월 31일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군대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렸다. 순종은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에게 의뢰하라”는 조령도 내렸다. 8월 1일 무기반납에 불응한 대한제국군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가 봉기했지만, 일본군에 3시간 만에 진압됐다. 이강년은 단양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의 진위대(대한제국의 지방군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 부대와 합세하였다.  


이후 충주 전투, 제천 전투, 싸릿재 전투, 죽령 전투, 고리평 전투, 백자동 전투를 거쳐 그해 말 서울진공작전에도 참여했다. 1908년 초가 되자 이강년 부대는 용소동 전투, 갈기동 전투, 백담사 전투, 안동서벽 전투 등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 걸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하지만 이강년은 1908년 6월 전투에서 발목에 총알을 맞고 체포되었고, 그해 가을 서대문형무소(경성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약 1만5천 명의 의병이 목숨을 던졌다.  


당시 경기도 양평에서 의병을 만나 인터뷰도 했던 캐나다 출신 신문기자 맥켄지(F.A. Mckenzie)는 “많은 전투에서 일본군이 부상자나 투항자 전부를 살육했다”고 <조선의 비극>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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