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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한 사람의 삶이라는 거대한 바다

등록일 2022년11월02일 10시07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손시내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중심엔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가 있다. 십수 년 전부터 카메라를 들고 일본과 평양을 오가는 재일 코리안 가족의 삶을 기록해온 양영희 감독. 그는 <디어 평양>(2006)에선 열렬한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활동가인 아버지의 삶과 기억을 물었고, <굿바이, 평양>(2009)에선 평양에서 태어난 조카를 통해 자신을 돌아봤다. 막상 들여다보면 가족의 소소한 모습이 담긴 평범한 영상 일기와도 같은 영화들이지만, 그 여정이 결코 쉽고 편안했던 것은 아니다.

 

재일 코리안 1세로 오사카에 거주하며 평생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고 살아온 부모님, 그런 부모에 의해 북한으로 보내진 세 오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어 집을 떠나고 때로 부모를 원망하며 성장한 막내딸. 양영희 감독의 가족사는 한반도를 휩쓸었던 전쟁과 분단의 소용돌이에 너무나 가까이 있다.

 

하지만 그가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의 가족이 특별하다거나, 역사가 너무나 아이러니하다는 식의 크고 거창한 말이 아니다. 망가지지 않은 가족은 없다는 깨달음, 그 통찰을 바탕으로 감독은 서로 생각과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한 울타리 안에서 부대끼고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과연 그의 영화들 속엔 ‘투철한 활동가’의 모습이나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는 북한의 삶 대신 웃고 떠들고 상념에 잠기는 평범한 인간의 얼굴이 가득 담긴다.

 

그 얼굴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끝내 모든 것을 서로 이해하고 하나로 화합하는 모양새가 아니라, 그토록 다른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장 중요하게 포착해낸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는 전작들에서 항상 고요히 존재감을 각인했던 어머니의 삶이 작품의 뼈대가 된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딸의 마음 역시 중요한 축이다.

 


△출처=다음영화

 

영화는 병상에 누운 어머니 강정희 씨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어머니는 어딘지 꿈꾸는 것 같은 얼굴로 어린 시절 겪었던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관덕정 마당, 기관총, 산부대, 외삼촌의 죽음까지…. 어머니는 지금 당신이 18살에 겪었던 제주 4·3에 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평생을 아무 말 않고 살다가, 여든이 넘어 갑자기 마음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낸 연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그 이유를 굳이 캐묻지 않는다. 대신 어머니가 그 말을 하게 된 즈음 생긴 가족의 변화를 찬찬히 담는다.

 

가족이라고 해봐야 양영희 감독과 어머니가 전부다. 아버지는 2009년에 세상을 떠났고, 북한에 비판적인 내용인 영화를 만든 감독의 평양 입국은 금지된 탓이다. 세 아들은 물론 자기 형제들 역시 북으로 보낸 어머니는 지난 세월 내내 일가의 가장 역할을 해왔다. 부지런히 일해 번 돈으로 북에 생필품을 보내며 그들의 생활을 지원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노쇠한 어머니는 이제 북한의 가족을 지원하기보다 당장의 빚을 갚고 일본에서의 생활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도쿄에 머무는 딸은 오사카에 혼자 사는 어머니를 주기적으로 방문하며 어머니의 일상을 돌보고 종종 카메라를 들어 그 일상을 기록한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일본인 남자가 들어온다.

 

아버지는 생전 미국 놈이나 일본 놈과는 연애도 결혼도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어머니 역시 같은 입장이었을 테다. 그러나 영화에 담긴 2016년의 어머니는 더운 여름에 양복을 빼입고 “따님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며 찾아온 일본인 남자에게 백숙을 해 먹인다. 현재 감독의 남편이자 영화의 총괄 프로듀서이기도 한 아라이 카오루는 ‘어머니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 정도로 그칠 수 있었던 영화에 다른 그림을 그려낸 주역이다. 한쪽에서는 어머니가 전통적 방법에 따라 닭의 배 속 가득 마늘을 넣고 꿰매 진한 국물이 나올 때까지 끓이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더우면 양복을 벗으라는 말에 극구 사양하던 예비 사위가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반팔티를 입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나타난다. 세 사람이 둘러앉은 식탁에는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총과 칼 대신 수저를 들자”는 뜻이 담긴 영화의 제목이 더없이 정확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놓고 김일성 부자의 사진이 걸려있는 집에서, 그들은 서로의 다른 이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대신 함께 밥을 먹는다. 일단 수저를 드는 행위가 그 어떤 싸움보다 중요하다는 듯이 말이다.

 


△출처=다음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수프’는 장모에게서 사위에게로 전수된다. 첫 만남 이후 그들은 같이 장을 보고, 백숙 끓이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며, 나중엔 사위가 장모를 위해 음식을 만든다. 새로운 가족을 만든 세 사람은 사진관을 찾아 한복을 입고 가족사진도 찍는다. 그리고 그즈음, 어머니가 제주를 방문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문재인 정권에서 70주년을 맞은 4·3 추념식에 소위 ‘조선 국적자’인 사람들도 방문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제주 4·3 연구소에서는 1948년 국가가 자행한 학살의 체험자를 찾아 오사카의 어머니를 찾는다.

 

지금도 생생하다며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참혹하고 슬픈 역사의 한 단면이다. 다만 그 경험을 세밀하게 이해하고 들어줄 이들을 만난 덕에 어머니는 평생을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어제 겪은 듯 선명하고 또렷하게 전할 수 있게 됐다. 그 이후 알츠하이머가 급격히 진행된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을 찾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평양에서 조울증을 앓다 죽은 큰아들 건오는 어디 있느냐고 묻기 시작한다. 영화는 슬픔과 눈물을 품고 세 가족의 제주 방문기를 담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제야 제주 땅을 밟았건만, 어머니는 기억과 시간을 잃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감독은 마침내 4·3을 제대로 마주한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부모의 뿌리와 가족의 시작이 있는 곳. 영화는 기억을 삼키고, 떠올리고, 그 기억과 더불어 평생을 살아온 한 인간의 모습을 진득하게 관찰하고 나서야, 어머니가 겪은 4·3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을 통해 정리하고 전달한다.

 

제주 출신 부모에게서 오사카에서 태어난 소녀는 민족차별과 빈곤을 경험하다가 해방 이후 제주로 건너갔다. 그리고 3년 뒤,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도민들에게 행해진 무참한 살육을 피해, 소녀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목숨을 걸고 밀항선을 타 다시 오사카에 당도한다. 18살의 어머니에겐 약혼자도 있었지만, 그는 산에서 투쟁을 지원하다 목숨을 잃었다.

 


△출처=다음영화

 

양영희 감독에게 제주는 아버지의 고향이자 어머니의 청춘이 있는 곳이다. 4·3은 왜 그의 부모가 그토록 남한 정부를 불신하고 살아왔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이자, 한 인간의 조국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가슴 아픈 질문의 가운데 놓일 법한 비극의 역사다. 감독의 카메라에 담긴 부모는 줄곧 밝은 얼굴로 수령님의 노래를 불렀고, 기쁜 마음으로 평양을 오갔다.

 

이들에게 조국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들은 평생 어떤 조국을 찾아왔을까. 여기 답하기 위해선 복잡한 역사적, 정치적 물음이 함께 던져져야 할 것이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그 모든 질문에 앞서 역사의 풍랑을 헤쳐 온 한 인간의 존재를, 그의 곁을 조용히 지키는 가족의 모습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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