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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일본 보수의 가치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등록일 2022년05월18일 09시31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한국에서 일본 논의는 과거사에 집중된다. 한일관계 특성상 불가피한 부분도 있겠으나 특정 부분은 다소 과장해 해석하는 반면, 이외 부분에는 무관심하다. 비록 불편한 이웃국가라 해도 보수의 가치는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사실 ‘자민당 일당독재’란 수사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민주적 선거경쟁이 존재하지만 일당이 장기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체제는 한국의 87년 이전 권위주의체제와 구분된다. 1932년부터 44년간 사민당이 집권한 스웨덴을 독재국가라 말하지 않듯 말이다.

 


△ 출처 = 이미지투데이


일본 보수는 성장뿐 아니라 분배에도 유능했다. 오랫동안 정권교체 없이 통치가 가능했던 이유다. 일본은 1980년대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세네 번째로 평등한 나라였다. 소득분배만이 아니라 교육, 영아 사망률, 범죄, 건강 혜택 등 영역에서 북유럽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실업률 역시 완전고용에 가까웠다. 정치적으로 보수당이 장기집권했지만 사회는 비교적 진보적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평등하고 완전고용이 이뤄지는 국가 중 사민주의 정당이 정권에 참여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로, 예외민주주의국가라 불리기도 했다.

자민당은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 지방의 중소 상공인과 농민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했다. ‘성장’만큼 분배를 중시하고 지방 농민과 중소 상공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세력이 한 정당 내 공존한다. 다양한 이해집단을 대표하고 다른 정책 지향을 가진 파벌이 경쟁하며 당내 중심권력을 교체했다. 이 점이 비교적 정치세력의 건전성을 유지해 야당과 경쟁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

일본 기업의 경우 1945년 패전 후 급진적 재벌해체가 단행되며 전근대적 가족 경영이나 족벌체제가 사라졌다. 이후 일본 사용자들은 소유주보다 경영자에 가깝게 변화했다. 전후 격렬한 노동자들의 쟁의와 투쟁이 이어지며, 1960년대 이후 기업과 자민당은 노동을 기업과 사회운영의 한 행위자로서 받아들였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대기업일수록 노조 없는 기업은 상상하기 어렵다. 기업 상장 요건으로 ‘노조’설립을 꼽기도 한다. 유럽식 산별교섭이나 노사 공동결정제도가 법제화되지는 않았으나, 한국보다 노동권력은 강한 편이라 ‘노사협력’이 구현되는 효과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일본도 1990년대 후반부터 신자유주의적 규제완화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간 일본 사회를 통합했던 기업복지·종신고용 축이 크게 약화되며 비정규직이 급증했고 불평등도 심각해졌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영미권보다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늦었고, ‘보수’의 특징답게 급격한 변화보다 기존 구조를 유지했다. 여전히 일본 기업은 미국의 CEO처럼 막대한 성과보수를 받는 데에 거부감이 있고, 적어도 고용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인식이 있다. 종신고용 시대가 아니라지만 정년까지 고용유지 비율이 높은 이유다. 코로나19로 인한 고용위기 시대에, 일본 경제단체연합회를 비롯한 경제 4단체가 ‘사원의 고용유지가 최우선의 가치’라며 “업무가 없어지면 다른 업무로 배치전환이나 계열사로 전보조치라도 활용”하라고 제언한 것은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법보다 ‘규범’이 강한 일본 사회에서 경제단체의 방침은 개별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적지 않다.

8년간 장기집권한 아베 총리의 경우 외교안보 노선에서 보수 중에도 오른쪽에 가깝지만, 경제정책에서 ‘시장보수’와 차이가 있다. 그는 기업에 유례없는 임금인상이나 사회보장 부담을 수용하게 해 재계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아베 재임시절인 2018년 법제화된 노동대개혁안(案)에는 화이트칼라의 재량노동에 대한 재계 요구만이 아니라, 동일노동 동일임금 및 과로사 방지라는 노동측 주장도 주요 부분으로 포함됐다. 비록 일본 노동시장 구조상 ‘일본식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으나. 자민당도 불평등과 고용불안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유력정치인인 노다 세이코(野田聖子)는 장애인·여성·고령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다양성 있는 일본 사회’란 가치를 내세웠다. 선거용으로만 보기 어려운 데에는 일본 우파가 왼쪽에서 제기되는 비판을 일부 수용해 자신들의 수용선을 넓히는 식으로 생존해 왔기 때문이다.

자민당 노선은 주변국의 불신을 자초하는 대외정책적 한계가 분명하다. 또한 일본적 재분배 방식-기업복지와 보조금을 통해 지역과 중소 상공인, 농민 소득 보장-은 유럽형 복지시스템에 비해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훨씬 취약했다. 심각해진 격차문제에 해법을 찾기 어려운 구조적 원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일본 보수는 공동체 통합을 저해하는 수준의 불평등은 해소돼야 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는 점은 공유한다.

나는 한국 보수가 일제에 부역한 태생적 한계가 있다거나 소위 더불어민주당조차 보수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공동체 유지를 위해서라도 일터에서 사람이 죽지 않아야 하고, 코로나19로 터전을 잃은 이들도 생활은 가능해야 한다는 점은 당파를 떠나 공유 가능한 최소선 아닐까. 국회와 정당이 상대 진영의 한심함에서 존재 이유를 찾기보다, 스스로가 문제를 다루는 시민의 대표체임을 증명하길 희망한다. 우리에겐 좋은 진보만큼이나 좋은 보수도 필요해 보인다.

※ 이 글은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넌 어때?' 코너에 연재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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