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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증거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증하라니

이동철의 상담노트

등록일 2021년11월19일 17시30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내가 일하는 상담소에 자주 들러 상담을 요청하는 두 남자가 있다. 퇴직 공무원인 강씨는 늘 단정하게 빗어 넘긴 백발에 은은한 스킨향을 풍기는 신사다. 상담이 시작되면 그는 언제나 자신이 겪은 피해사례가 적힌 A4용지를 꺼낸다.

거기에는 일터에서 자신이 사업주나 입주민에게 겪은 피해사례가 육하원칙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나로서는 그가 겪은 피해사례가 근로기준법에 위반됐는지를 점검해 진정서 초안을 정리해 주는 정도의 수고만 하면 됐다.

그는 언제나 사용자의 부당한 지시를 예상해 대화 내용을 녹취하고, 근무기록 등을 휴대전화로 촬영해 둔다. 때문에 임금체불이나 부당해고를 하소연하는 그를 도와 고용노동지청에 제기한 임금체불 사건과 지방노동위원회에 제기한 부당해고 구제신청 사건은 대개 강씨의 승리로 끝났다.

 


△ 출처 = 이미지투데이

 

또 한 명의 ‘단골’ 상담고객인 박씨는 행색부터가 초라하다. 자고 일어나 감지 않은 듯한 부스스한 머리에 추리닝과 슬리퍼 차림으로 상담실 문을 두드린다.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박씨의 방문이 반갑지 않은데, 약속 없이 불쑥 찾아온 탓보다는 그의 하소연을 도대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담이 시작되면 박씨는 논리정연한 강씨와 달리 ‘의식의 흐름’대로 자신의 피해사례를 이야기한다. 그가 당한 피해를 입증 가능한지 물을 때마다 그는 “사장이 그럴 줄 알았으면 자신이 그 회사를 다녔겠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때문에 나는 언제나 건성으로 박씨에게 원론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부를 찾아가 진정을 해 보시되 결과는 장담할 수 없네요.

전국의 노동상담기관을 찾는 대다수의 피해 노동자들은 박씨에 가깝다. 박씨의 하소연처럼 사장이 월급을 떼먹고, 마음에 안 든다며 하루아침에 자신을 자를 줄 알았다면 그 회사에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씨가 자신의 피해 사례를 구제받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피해를 아주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근로기준법에 따른 권리 구제나 산재보상제도가 피해 노동자로 하여금 이를 입증해야 하는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로 연장근로를 했음에도 사용자가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경우 연장근로를 했다는 사실을 피해 노동자가 입증해야 한다. 대개 근무기록은 사용자가 보관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근로기준법은 임금대장 등 주요 고용관계 서류를 의무적으로 3년간 보관하도록 정하고 있다. 때문에 연장근로수당 미지급에 따른 임금체불 진정을 접수한 고용노동지청에서는 사용자에게 근무기록을 제출하게 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연장근로수당 미지급 여부를 신속하게 판단해 미지급 사실이 확인되면 지급청산할 수 있도록 지도하면 된다.

그런데 사용자가 근무기록을 제출하지 않고 마냥 피해 노동자의 연장근로 주장을 부인하면 당사자의 주장이 엇갈린다며 고용노동지청에서는 피해 노동자에게 근로제공 사실의 입증을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진다.

산재 승인 절차도 마찬가지다. 산재보상은 일터에서 업무와 연관돼 노동자가 다치거나 사망할 경우 이를 산업재해보상보험에 따라 보상하는 제도다. 그러나 상담을 하다 보면 일터에서 쓰러져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 있는데도 업무와 연관성이 부족해 산재가 아니라는 판정이 종종 나온다.

하루 12시간씩 주야간으로 경비노동을 하던 김씨는 교대근무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서른 초반의 건강했던 그는 일터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음에도 산재가 아니라고 보상을 받지 못했다. 김씨의 상병이 산재로 인정되려면 고용노동부 고시인 업무상 재해 인정 기준에서 ‘만성적 과로’에 해당해야 한다. 그 기준에는 김씨가 쓰러지기 전 12주 동안 1주 평균 52시간을 초과해서 일해야 업무연관성이 강하게 인정된다고 정하고 있다.

산재 인정을 담당한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김씨의 근로시간을 산정했더니 52시간에 조금 미달해 업무상 연관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야간에 일한 시간은 30%를 가산해 줘야 하는데 김씨 같은 경비노동자의 경우 이를 제외한다고 해당 고시는 정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에는 경비노동자의 야간근로도 1.5배를 가산해 임금을 주도록 정하고 있다. 그런데 법보다 아래의 행정부 고시 따위가 법의 취지를 무시하는 산재 인정기준을 정해 실제 재해 노동자자가 만성적으로 과로했는지를 점검해 보지도 않고 업무와 연관성을 입증하라고 한다. 이런 억울한 피해 노동자의 사례를 접하다 보니 박씨가 우리 상담소에 와서 왜 화를 냈는지 이해가 됐다. 갑자기 박씨에게 미안해졌다.

한국노총 부천노동상담소 상담부장 (leeseyha@naver.com)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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