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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직업총동맹의 기원

등록일 2018년07월11일 15시13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1945년11월 30일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북조선총국은 1946년 3월 북조선로동총동맹으로, 두 달 뒤 5월 북조선직업동맹으로 이름을 바꿨다. 위원장엔 최경덕이 선출되었다. 최경덕은 1930년대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함흥공장 등에서 적색노동조합운동을 펼친 저명한 공산주의자였다. 초기엔 사무직들이 노동조합에 들어오지 않고 독자로 직업동맹을 꾸렸다. 1945년 11월과 12월 문화인직업동맹과 북조선인민교원직업동맹결성준비위가 조직되었고, 1946년 2월 평양시인민교원직업동맹이 결성되었다. 1946년 봄 출범한 북조선직업동맹은 생산직 중심의 노동조합과 사무직 중심의 직업동맹이 합쳐진 것이다. 1947년 9월 당시17개 산별 산하 3507개 초급단체에 385,000명의 맹원을 두었다.


북조선직업동맹이 조선직업총동맹으로 개편된 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숨을 돌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1950년 12월 21~23일 자강도 강계시에서 제3차 전원회의를 소집하여 <남북 근로단체들의 통합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 1월 20~22일 회의를 열어 북한의 북조선직업동맹과 남한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을 통합하여 조선직업총동맹을 출범시켰다. 위원장엔 현훈이 선출되었다. 현훈은 1930년대 함경도에서 적색농민조합운동과 적색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한 공산주의자였다. 


북한 정권 초기 직업동맹의 성격이 무엇이냐는 문제는 치열한 논쟁거리였다. 북조선인민위원회 노동국장 오기섭은 1947년 "직업동맹은 과거나 현재를 불구하고 로동계급의 리익을 위하여 투쟁하는 로동자의 집합체"라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북한 정권 주류의 생각은 달랐다. 1949년 11월 열린 직업동맹열성자대회에서 김일성은 "직업동맹 단체들이 인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군중동원사업을 강화하고 군중들에게 국가의 재산과 물자를 절약하는 교육을 실시하며, 노동 규율을 강화하고, 공장 기업소에 생산협의회를 조직하여 증산 경쟁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노동자 권익 투쟁 단체로서의 성격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군사위원회 결정 제6호 <전시로동에 관하여>가 선포되면서 각 공장에서 전시증산운동이 전개되어 8시간 노동을 12시간 노동으로 연장하고, 3교대제를 2교대제로 개편하고, '시간외 노동 및 공휴일 노동 운동'이 펼쳐지고, '전선돌격대운동', '전선작업반운동', '청년작업잔운동', 2인분, 3인분 초과생산운동 등 갖가지 명칭의 증산경쟁운동이 전개되었다.
전쟁이후에도 노동자 권익을 보장하는 단체로서의 성격은 보장되지 못했다. 1964년 6월 26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9차 전원회의는 직업동맹이 노동에 대한 관리감독 기능을 가질 필요가 없다며 단체계약(단체교섭) 권한을 폐지해 버렸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조선직업총동맹은 완전한 사상교양단체로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주체사상, 당정책, 혁명전통, 계급 교양을 강화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이후 직업동맹은 사실상 "당과 로동계급을 련결시키는 인전대"로 전락하였다.


1981년 11월 6차 대회가 열린 지 35년 만에 2016년 10월 조선직업총동맹 7차 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다(사진). 김정은은 서한을 보내 "직업동맹의 지도사상은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입니다. 직업동맹은 조선로동당의 령도에 끝없이 충실해야 합니다"고 다그쳤다. 조선직업총동맹이 사상교양단체임을 거듭 못박은 것이다.

윤효원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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