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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하여

이동철의 상담노트

등록일 2021년08월26일 11시02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한때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서정적 정치 구호가 유권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정치인 손학규가 18대 대통령 선거 민주통합당 후보 경선에서 내세운 경제정책의 핵심 구호였다. 물질적 풍요를 위해 밤늦게까지 기계처럼 일하는 ‘경제동물’에서 벗어나 저녁이면 가족과 강변을 산책하는 그런 한갓지고 여유로운 삶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손학규 후보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지만 우리 사회는 그 방향성에 공감했고 ‘저녁이 있는 삶’은 문재인 정부의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 시행으로 그 결실을 맺는 듯했다.

2018년 2월 국회는 1주 근로시간을 법정 근로시간 40시간에 더해 주말 포함 연장근로를 12시간까지만 허용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동안은 주말 2일을 더해 최대 28시간(주중 12시간+주말 8시간씩 16시간)까지 초과근로가 가능했다. 이로써 2017년 연간 2천246시간인 멕시코에 이어 2천14시간으로 세계 2위를 차지했던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18년부터 감소해 2020년에는 1천952시간으로 단축됐다.

 


△ 출처 = 이미지투데이


그러나 부작용도 상당했다. 올해까지도 우리 상담소에는 주 52시간제 시행에 따른 근로시간단축 문제를 문의하는 상담이 폭증했는데 대부분 300명 미만 제조업 사업장 노동자들의 하소연이다. 기업이 주 52시간제를 적용받게 되면서 근로시간을 줄이는데 그에 따라 줄어드는 임금 감액의 고통을 호소하는 상담이 주를 이뤘다.

“특근이 줄어 시간외수당이 줄어드니까 애들 학원비 같은 씀씀이를 줄여야 하더라고요. 결국 아내가 일을 시작했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은 늘었는데 좀 어색합니다.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 않고요. 돈 벌어다 주면 내 역할은 다했다 생각했는데, 잔업하고 특근할 때가 차라리 마음이 편합니다.”

정부출현기관이나 공기업·대기업 등은 이미 주 52시간제 시행에 맞춰 인력운용의 틀을 정비해 왔다. 기업복지 제도가 풍부해 여가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도 이들 기업의 주 52시간제 안착에 보탬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경제의 허리를 담당하면서도 열악한 근로조건의 300명 미만 제조업 사업장은 달랐다. 주 52시간제 시행에 따라 연장근로가 감소해 실질임금이 줄었다. 주 52시간제 시행이 되레 가정의 경제적 위기를 가져온 것이다. 이들 사업장은 대부분 최저임금 수준의 통상시급에 수요일을 제외하고 1일 4시간에 토요일 특근까지 월 100시간 넘는 연장근로로 실질임금이 주어진다. 초과근로를 절반 이상으로 줄이면 실질임금 감소율이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50%까지 떨어지는 현실에서 중소 제조업체 근로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300명 미만 제조업 현장 노동조합의 불만도 상당했다. 양대 노총에서 내걸고 있는 주 52시간제 전면 시행의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임금감액의 고통이 너무 커 주 52시간제를 곱게 보지 않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단적인 예로 연합체인 산별노동조합에서는 매년 주 52시간제 전면 시행을 주요 대정부 요구로 내세우지만 개별 노동조합은 주 52시간제 시행에 유예를 부여해 달라며 청원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부작용 해소를 위해서 시급하게는 주 52시간제에 따른 노동자의 실질임금 감소를 최소화해야 한다. 최저임금 수준이거나 이보다 낮은 통상임금을 최저임금 이상으로 제도화해 연장근로 유인을 줄이면서 자연스레 기본급을 현실화해야 한다. 또한 형식적으로 법을 피해 가기 위해 근로시간은 단축해 놓고 업무강도를 강화하는 꼼수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는 임금체계 개편도 시급하다.

장기적으로는 노동조합과 정부의 정책적 역량이 요구된다. 노동운동의 대의인 노동시간단축을 정책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당위성만 앞세웠던 노동운동진영의 조급함을 반성하며 근로시간단축으로 진짜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정책대안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의 예로 가계부담에서 사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해 정부가 무상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는 등 사회임금을 확대하도록 캠페인을 펼쳐 가는 것은 어떤가. 승마나 악기연주 등 양질의 방과후 교육을 실시해 가계의 부담을 낮춰 준다면 내 아이가 뒤처질까 하는 조바심에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 장시간 노동의 유혹에 빠지는 노동자가 줄 것이다.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대표되는 노동시간단축은 경제적 이윤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의 가치를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와 관련한 고민과 맞물리는 거대한 의제다. 남성 가장의 장시간 노동으로 지탱하던 불안한 우리 사회의 소비중심적 경제구조를 어떻게 가정과 일이 양립할 수 있도록 재편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놓여 있다. 이제 진짜 노동조합의 철학과 정책대안이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한국노총 부천노동상담소 상담부장 (leeseyha@naver.com)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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