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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는 민주주의에 기여하고 있는가

정혜윤 한국노총중앙연구원 연구위원

등록일 2021년07월20일 10시05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나는 노동조합 연구원에 취직하며 이토록 많은 연구자를 보게 될 줄 몰랐다. 노조가 참여하는 토론회, 크고 작은 용역 연구만이 아니다. 2020년 기준 중앙부처 위원회만 585개니 지방자치단체까지 포함하면 각종 회의체에 참석하는 전문가들 숫자가 얼마나 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참여’의 가치를 강조한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참여하는지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노동조합을 비롯한 결사체들은 정책결정에 관여해 왔다. 자신의 이익을 ‘대표’해 제도 내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다. 한국도 87년 이후 폐쇄적 관료 결정체계에서 ‘참여’공간이 열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권력에서 소외됐던 노동자를 비롯해 농민·자영업자 등 결사체들의 조직적 참여가 괄목할 만하게 늘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 ‘교육받은 중산층 전문가’의 참여가 크게 확대됐고 한국이나 대만 같은 신생민주주의 국가의 특징이기도 하다.

 


△ 출처 = 클립아트코리아

 
전문가가 위원회에서 자문에 그치지 않고 ‘책임’ 있는 ‘결정’을 하는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 공적 책임이란 주체에게 정당성이 부여될 때 가능하다. 통상 민주주의의 국가에서 정책결정의 주요 주체는 정치인, 이해당사자 집단, 관료 세 집단이다. 정치인은 시민들에게 선거를 통해 결정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점에서, 이해당사자 집단은 이해관계가 있는 당사자들을 대표로서, 관료는 정책을 실현하는 행정 권력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문가란 권한을 부여하고 책임을 지울 뚜렷한 근거가 없다.

전문가의 능력은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입법을 책임지거나 일을 집행하는 데 있지 않다. 가령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하고 연구소나 대학에서 채용하는 이유는 전문 분야에 관련된 연구와 교육의 능력을 가져서다. 그런데 지금 주요 위원회는 노동조합을 비롯한 결사체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비교적 ‘대리’해 주거나 논의를 잘 ‘조정’하고 ‘결정’해 줄 전문가를 가려내 공익위원이나 위원장으로 추천할 수밖에 없다. 소임을 다하지 못해도 책임을 물을 정당성이나 방법을 찾기 어렵다는 데 고민이 있다.

전문가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또 다른 공간은 선거 과정이다. 요즘도 유력 후보자가 어떤 전문가를 만나는지 화제가 되고 캠프들은 전문가 영입 경쟁에 힘쓰며 정책을 만든다는 이미지를 홍보하느라 분주하다. 혹자는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이 정책을 만드는 게 당연하지 않냐,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잠시 장이 서듯 수많은 인사가 모이는 곳이 선거캠프이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누가 어떻게 공약을 만들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전문가가 당적을 가지고 조직을 위해 일하기보다 ‘초당파적 전문가’를 자처한다면 정책의 실현과 그 결과에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외부’전문가들의 논의만으로 진짜 정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최저임금 문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저임금 1만원’이 처음 등장한 때는 2012년 대선이다. 당시엔 김순자 ‘군소후보의 이색공약’로 여겨졌고 2015년만 해도 문재인 당시 대선후보는 유보적 입장이었다. 그런데 ‘최저임금 1만원’은 2016년 총선·2017년 대선을 거치며 문재인캠프의 ‘주요 공약’이 됐고 진보정당뿐 아니라 보수정당의 유승민·홍준표 후보까지 내세우는 정치 슬로건이 됐다.

연구자는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과 효과를 분석할 수 있으며, 선거전문가는 이를 슬로건으로 할지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입법 권력을 가진 한국의 주요 정당에는 비교적 노동자조직에 우호적인 정치인과 중소상공인·대기업의 후원을 받는 정치인들이 한 당에 공존한다. 이들이 지지집단 간 충돌 지점을 논의해 조정된 ‘정당’의 정책이 되지 않으면 그저 전문가의 수고로움을 들인 종이 쪼가리가 되기 쉽다. 그러니 오늘은 ‘최저임금 인상’이 불평등을 개선하는 최선의 정책이 됐다가, 내일은 고용을 위축시키고 중소상공인을 어렵게 한 원인이라며, ‘산입범위 확대’ 법안이 통과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입범위 확대로 노조가 없거나 약한 사업장일수록 최저임금이 올라도 임금이 동결될 수 있다는 우려는 이미 현실이 됐다. 정치인들은 ‘최저임금 1만원’이 자신이 대변하는 지지집단을 고려해 진지하게 논의한 적 없는 그저 슬로건에 불과하다 여기고, 전문가도 캠프가 해산하면 그만이라 생각하니 누가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당장 변화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도 노동계 참여가 필요한 각종 위원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총연맹·산별연맹의 대표자나 간부들이 모든 내용을 잘 숙지해 논의하기란 역량도 자원도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언젠가 타임오프제가 개선되고 조합비가 지금보다 중앙의 기능을 튼튼히 해 스스로를 대변하는 데 실력이 생기는 세상을 꿈꾼다. 정당 정책연구소도 정당법 규제에서 벗어나 단기 보고나 선거 대응을 넘어서, 더 많은 인력과 재원으로 정당 구성원들과 지지 집단이 진짜 힘 있는 정책을 만드는 시대를 희망한다.

전문가가 민주정치에 기여하고자 한다면 공적으로 정치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 ‘공익위원’이나 ‘초당적 전문가주의’라는 우산 아래 ‘책임’ 없이 영향력만 향유하려 해서는 의미 있는 정책이 실현되지도, 민주주의가 좋아지지도 않는다. 아울러 정치권이 전문가, 특히 연구자를 진짜 존중하는 방법은 끊임없이 회의체나 캠프에 불러 극소수에게 권력으로 향하는 급행열차를 보여주기보다 무가치한 성과지표로 연구비를 옥죄지 않고 본업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 이 글은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윤·희의 넌 어때?' 코너에 공동 연재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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