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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노조 비판이 아쉬운 이유

정혜윤 한국노총중앙연구원 연구위원

등록일 2021년07월20일 09시59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보수일간지의 ‘귀족노조’라는 공격은 상대적으로 ‘임금’을 높게 받는 중산층 노동자의 등장과 확대를 노동운동의 타락으로 보는 듯하다. 노동운동 활동가 중에도 본인이 소속된 노조 조합원이 정규직·중산층인 반면 미조직 노동자들이 불안정·취약 계층이라는 점에 내적 갈등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동운동이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지향하는 것은 당연하나, 현재 노동운동을 비판하고 제언하는 방식이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
 



첫째, 대다수 노동하는 시민들의 삶이 늘 가난해야 할 이유는 없다. 선진민주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들은 중간 계급의 중심을 차지한다. 한국 역시 중산층 가운데 대기업 노동자,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비중이 커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노동운동의 성과가 일하는 사람들의 다수를 사회 중간층으로 이끈다면 그 역시 사회발전이고 진보다. 대기업 노조운동이 불안정 노동자 집단을 포괄하는 과제가 중요하다 할 수는 있어도, 중산층에 가까운 급여를 받는 것 자체를 죄악시 할 수는 없다.

중산층 노동자의 존재가 중요한 이유는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일수록 중간층과 하층 간 ‘복지동맹’이 사회안전망 확충의 주요 동력이었다는 점이다. 앞으로 한국의 복지 확장과 분배 구조 개선을 위해 상대적으로 고임금 노동자들이 더 비용을 부담하도록 설득해 ‘복지연대’를 형성하는 것이 과제가 될 것이다.

둘째, 노동운동이 ‘정규직 조합주의’에 매몰됐다거나 오히려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기여’한다는 비판에 타당한 부분이 있으나, 노조를 공격하거나 냉소해도 크게 부담을 느끼지 못하는 분위기가 아쉽다. 대다수 노동하는 시민들의 권익과 열정을 표출하는 자율적 결사체로 노조를 존중하는 문화가 그 나라 민주주의의 수준인데 말이다.

노조가 민주주의 역사에서 핵심 역할을 한 데에는 노동자가 이타적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주체여서가 아니다. 때로 이기적이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자들이 ‘조직’이란 체계를 통해 열정과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었고, 기업 운영과 국가기구에 참여하며 책임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노조가 기업 운영의 한 축이 되면 이윤 창출을 함께 고민하며 생산성과 임금의 연동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노조가 형식적 위원회 참여를 넘어서 나라의 중요 정책결정 과정에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조합원을 넘어선 공동체 전체에 대한 장기적 시각 속에 타협이 가능하다. 참여와 권한이 있는 곳에 ‘책임’이 있고, ‘대표성’ 있는 ‘조직’만이 조정과 타협이 가능하다.

가끔 초당적 전문가와 계층을 초월한 시민운동을 앞세우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문제를 조정할 수 있는 당사자 대표도 아니고 정치적 책임도 없는 이들이 가지는 한계는 분명하다. 좋은 제도는 책임 있는 이해당사자들이 충분한 논쟁과 합의 끝에 도출해야 오래가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이를 담당할 수 있는 대표적 시민 권력의 조직모델이 노조다.

노동과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조사한 여러 학자들이 강조하듯이, 노동자들의 이익과 열정을 대변하는 노조, 그런 노조와 협력하는 정당의 힘이 강한 나라일수록 계층 간 불평등 정도도 작고 복지수준도 높다. 행정 권력과 경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유력한 시민 권력의 조직 모델이 사회 집단 중에는 노조고, 정치 집단 중에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현재 노조와 정당의 행태가 마음에 안 들어도 이들을 더 좋게 만들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변화란 요원하다.

셋째, 때로 노조를 위한 지식인들의 고언이 애정 어린 조언임을 의심하지 않으나 방향의 제시를 넘어서, 그 과정에 대한 논의가 더 풍부해졌으면 한다. 가령 ‘사회연대를 위한 노조의 양보’나 ‘연공임금제 개선’을 피력하는 교수님도 본인 대학 시간강사와의 차별 해소를 위해 정교수의 임금을 동결·삭감하거나, 임금제를 개편하자고 동료 교수들을 설득해 변화를 만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변화란 선명한 ‘대의’를 넘어서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당사자들이 실천할 몫이지만, 연구는 좋은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는 물적 토대와 과정을 제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혹자는 보다 노동자 의식을 고양시키는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할지 모르겠다. 특히나 계몽적 보수주의자는 개인 자유와 함께 교육을 통한 인식 개선을 중시한다. 반면 진보주의자는 구조와 조건에 따라 인간의 인식이나 의지도 달라진다고 믿기에 구조나 조건을 바꿀 집단과 조직을 중시한다. 진보적 학자의 역할은 우리의 인식과 행위를 가두는 구조와 조건을 해명하고, 집단 간 갈등은 물론 합의 가능한 변화를 구체화할 수 있는 정치과정의 사례들을 제시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데 있다. 이론이 현실을 다 담을 수도, 또 딱 맞는 처방전을 줄 수도 없다. 다만 활동가들이 다양한 상상력 속에서 실천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정치적 올바름’을 가려내거나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하지 않다. 변화로 이어지려면 ‘충분한 고민’과 ‘언어의 절제’가 필요한 시대 같다.


※ 이 글은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윤·희의 넌 어때?' 코너에 공동 연재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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