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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빠 노부테츠 상

박신영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 다닐까>, <제가 왜 참아야 하죠?> 저자

등록일 2021년06월02일 15시58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오빠와 올케 언니는 종종 나를 불러내어 밥을 사 준다. 동생을 챙겨 먹이려는 마음이 반, 인생 상담과 하소연하려는 목적이 반이다. 엄마가 확연하게 치매 증세를 보인 후로는 대책 회의 성격이 더해졌다. 뇌혈관이 터져서 이성적 사고 능력을 잃어버린 엄마는 지난 세월동안 쌓인 인생의 한을 며느리를 괴롭히는 방법으로 풀었다. 오빠네 부부는 위기에 처했다.

 

4년 전 그날도 그랬다. 이혼하겠다는 언니의 전화를 받고 급히 쭈꾸미 맛집으로 불려 나갔다. 글쎄 오빠가 ‘엄마가 잘못해도 너만 참으면 집안이 편하다.’라고 말했다지 뭔가.

나는 오빠의 망언을 규탄했다. 오빠에게 그 말이 왜 문제인가를 알려주었다. 위로도 해 주었다. “그래그래, 오빠도 힘들지. 다 알아. 돌아가신 아빠 때문에 오랫동안 충격 받고 지냈는데 이번에는 엄마 차례네,,, 음, 쭈꾸미 다 건져 먹었으니 밥 좀 볶아 봐.”

 

밥을 볶으며 오빠가 말했다. “난 아빠 돌아가시고 별로 힘들지 않았어. 아빠가 나를 많이 때렸잖아. 넌 안 맞아 봐서 모르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는 답했다. “안 맞기는? 나도 같이 맞았어.” 오빠가 말했다. “아빠가 너는 이뻐하고 안 때렸잖아?”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나도 같이 맞았어. 그뿐이야? 난 아빠에게 매맞고 난 다음에는 오빠에게 또 맞았는데?” 오빠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난 너를 때린 적 없는데?”

 

버럭, 화를 냈다. “오빠는 아빠에게 맞고 나면 분풀이로 나를 때리곤 했어. 그러니까 오빠는 아빠 한 사람에게 맞았지만 나는 아빠랑 오빠 두 사람에게 맞고 살았다고!” 오빠가 뇌맑은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언제? 나는 기억 안 나는데?” 순간,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작가가 되는 것이 평소 희망인 나는, 지성은 쭈꾸미집 바닥에 던져버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오빠, 왜 역사 왜곡해? 일본인이야? 오늘 나랑 과거사 청산 해 볼까?”

 

▲ 출처 = 이미지투데이

 

내가 칼럼에 성차별 이야기를 쓰면, 지금은 성차별이 사라졌으며 오히려 여성우위시대라고 주장하는 댓글이 팔만대장경으로 달린다. 의아하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뉴스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왜 이럴까? 멀리 갈 것도 없다. 바로 자신 옆에 있는 엄마나 여자형제, 아내의 일상을 봐도 현실을 제대로 알 수 있는데. 평소 이 점이 너무 이상했는데 오빠가 우기는 것을 보니 깨달음이 왔다. 이들은 불리한 것은 안 보고 기억 안 하는 것이다. 자신의 아픔은 중요하니까 기억하지만 여성이 폭력을 당하고 힘들게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기에 기억을 못 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해자인 경우에도.

 

나는 구체적 정황을 짚어서 친절하게 오빠의 기억을 살려 주었다. 영화 <300>의 크세르크세스처럼 팔을 벌리고 외쳤다. “나는 관대하다! 지금 어른인 나는 어린 오빠를 용서한다. 그때의 오빠는 상처 받고 생각 모자란 어린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했던 과거 만행을 지금 성인인 오빠가 부정하는 것은 용서 못한다. 남매 인연 끊는 것도 불사하겠다.” 오빠는 좀 시간을 끌더니 더 이상 우기지 않고 인정했다. “기억나.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오빠의 얼굴은 벌갰다. 얼핏 보니 쭈꾸미 닮았다.

 

여성이나 어린 사람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이 많다. 가부장적 문화에서 자라났기에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상대에게 사과하면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는 한편, 약점을 쥔 상대가 자신을 공격하거나 무시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잘못을 인정하고 나면 다른 차원이 열린다. 결함을 서로 인정하는 평등한 인간으로서 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의 차원이.

 

자, 거짓말하고 우겨서 억지로 자존심을 지키고 동생을 잃을 것이냐, 과거를 청산하고 동생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이냐. 갈림길에서 오빠는 좋은 선택을 했다. 쓸데없이 남자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내가 오빠를 한 인간으로서 좋아하는 이유다. 다시 보니 쭈꾸미보다 잘 생겼네.

그날 저녁, 오빠가 당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져서 기분이 풀린 언니는 이혼 말을 집어 넣었다.

 

이후로 나는 오빠를 ‘노부테츠 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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