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저기 팻말엔 세계 주요 도시의 이름과 방향, 거리가 적혀 있다. 언젠가 부루마블이라는 보드게임 속에서 주사위 굴려 가 봤던 곳이다. 밥벌이하고부터는 몇 곳을 다니긴 했으나 저 목록에는 없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어느 날 간선도로를 달리다 공항으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치면서 여권 챙겨왔냐고 옆자리 동료에게 농담했다.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나이 더 먹고는 갈 수도 없겠다 싶은 곳도 많다. 돈이 없을 뿐이라고 친구는 말했다. 아니, 갈 시간이 없는 게 진짜 이유라고 그는 말했다. 눈치 안 보고 길게 쉴 수 있는 처지 사람이 내 주변엔 없었다.
휴가는 연말에 수당으로 계산되거나, 야근 철야 노동 속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리곤 했다. 아이는 비행기 몇 번 타 봤다고 외국 여행을 아주 우습게 안다. 어떤 나라 이름을 대면 내일 당장 비행기 타고 가자며 보챈다. 아이가 그 꿈을 오래도록 꿀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평생 몸 부려 일해서 먹고사느라, 해외여행은 엄두도 못 냈던 늙은 엄마 아빠와 함께 가고 싶은 곳도 저 목록에 있다.
돈과 시간이 다 문제일 테니, 내가 쥔 것은 무모함, 혹은 용기 정도다. 그러니 물어는 봐야겠다. 찌글찌글 주름 깊은 엄마 아빠에게도 젊은 시절 꿈꿔봤던 여행지 목록 한두 개 쯤은 있지 않을까. 어디로든 훌쩍 떠나고 싶은 가을이다. 서울 시청 앞에서 한 조경 노동자가 이정표 아래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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