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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인권이다

제573돌 한글날을 기리며

등록일 2019년10월01일 16시15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이건범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 대표

 

흔히 듣는 ‘계약직’, ‘정규직’과 같은 말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뜻이 명확하고 일상적인 용어지만, 외국인이나 발달이 느린 사람이 취업할 경우에는 이런 말 하나하나가 장벽일 수 있다.

 

이른바 ‘느린 학습자’를 위한 취업 규칙 안내, 노동법 안내 같은 길잡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나와는 상관 없을 것 같은 이런 일이 웬만큼 알아 듣고 산다는 사람들에게도 자주 일어난다. 우리가 공문서나 법령, 규칙 등에서 만나는 말 가운데에는 암초처럼 도사리고 있는 어려운 말이 제법 많다.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글들

 

사업가 최 씨는 7년 전에 처리했던 회사의 세금 신고가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150만 원가량의 종합 소득세를 내라는 고지서를 받았다. 깜짝 놀란 최 씨는 세무서를 찾아가 세금을 매긴 사유를 알아보고, 그 당시의 거래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세무서의 업무 착오라는 판단이 서서 세무서마다 있는 납세자보호 담당관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문서를 냈다. 3주일가량 지나 최 씨의 집으로 ‘이의신청 결정서’가 날아왔다. 첫 구절은 아래와 같았다. 

 

“주문 : 이 건 이의신청을 각하 결정합니다.”

 

순간 최 씨는 흠칫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각하’라는 말은 행정법에서 국가기관에 대한 행정상의 신청을 배척하는 처분을 뜻하며, ‘물리침’이라는 말로 순화했다고 나오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최 씨의 이의 제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말인데, 그 이유를 밝히는 문장을 읽다보니 뭐가 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는…… 부과 재척 기간이 5년으로 본 쟁점 금액은 이미 기간 경과하였기에 고지세액 직권 경정함. 살펴본 바와 같이, 처분청의 직권 시정으로 인하여 불복의 대상이 되는 처분이 존재하지 아니하므로 국세기본법…의 규정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결정서를 다 읽은 최 씨는 자신의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져 돈을 안 내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여지지 않아 세금을 내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결국 최 씨는 세무서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 세금을 내라고 요구할 기간이 지난 사안이라 없던 일로 수정됐고, 그래서 이의신청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 없어져 이의신청을 받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최 씨가 이 설명을 듣기까지는 전화를 무려 여섯 번이나 걸어야 했다. 게다가 세무서의 착오로 벌어진 일을 어려운 말로 비비 꼬아 어물쩍 넘어가는 것 같아서 기분도 몹시 나빴다. 

 

전태일의 바람은 이루어지고 있는가

 

법률에서 쓰는 용어는 쓸데없이 어렵다. 우리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법인 민법은 1958년에야 만들어졌다. 그때까지는 일제 강점기부터 사용하던 일본 민법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영향으로 우리 민법에는 일본식 한자말이 꽤나 많고 과거 국한문혼용 문장의 영향 탓에 어려운 한자말이 그득하다. “상대방과 짜고 거짓으로 한 의사표시”라고 하면 될 것을 “상대방과 통정한 허위의 의사표시(相對方과 通情한 虛僞의 意思表示)”라고 적고 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과거엔 근로기준법이나 노동법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려운 한자어에다 국한문혼용으로 써놓은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읽던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태일의 바람대로, 어려운 법률 문장과 한자말 용어를 좀 더 쉽게 바꾸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 제법 성과를 거두었다.

 

근로기준법 제14조에 규정된 ‘법령 요지 등의 게시’는 현재 “① 사용자는 이 법과 이 법에 따른 대통령령의 요지(要旨)와 취업규칙을 근로자가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장소에 항상 게시하거나 갖추어 두어 근로자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1997년만 해도 “①사용자는 이 법과 이 법에 의하여 발하는 대통령령의 요지와 취업규칙을 상시 각 사업장에 게시 또는 비치하여 근로자에게 주지시켜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상시’라는 한자어 때신 ‘항상’이라는 좀 더 친숙한 한자어로, ‘비치하다’ 대신 ‘갖추어두다’로, ‘주지시키다’ 대신 ‘널리 알리다’로 고쳤다. 게다가 주요 한자어는 모두 한자로 쓴 국한문혼용 문장이 2005년 뒤로는 한글전용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자와 한자말 용어가 줄어든 요즘은 영어와 로마자가 문제다. 시민의 안전을 다루는 말 가운데 싱크홀(땅꺼짐, 꺼진 구멍), 스크린도어(안전문), 핸드레일(손잡이), 논슬립(미끄럼막이), 그린푸드존(식품안전구역), 스쿨존(어린이보호구역), EMERGENCY(비상사태) 등과 같이 영어가 마구 쓰인다.

 

복지 용어에서도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통합돌봄), 바우처(이용권), 헬스 케어(건강 관리), 퍼실리테이터(촉진자), 코디네이터(상담사) 등이, 경제를 다루는 말에는 규제 샌드 박스(규제 미룸), 글로벌)세계적), 스타트업(새싹기업), 펀더멘털(기초), 벤치마킹(비교검토) 등이, 민생을 다루는 말에는 보이스 피싱(사기 전화), 골든 타임(금쪽 시간), 디지털 포렌식(디지털 과학수사), 로드 맵(일정 계획), 리스크(위험), 리콜(결함보상), 젠더(성, 성평등)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어 낱말이 쓰인다. 노동자 주변에서도 네트워크, 거버넌스, 노동 허브, 플랫폼 노동 등 정체를 알아채기 어려운 말들이 돌아다닌다.


문제는 이런 용어가 대개는 우리말로도 표현 가능한 것들을 영어로 표현하면서 우리말을 밀어내고, 그 때문에 영어 능력의 격차에 따라 국민의 알 권리를 차별하게 된다는 점이다. 영어 사용 장면에서 쉽게 노출되는 학력 신분은 ‘무식한’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리고, 그 때문에 영어교육 열병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노동운동계에서도 영어를 쓰지 않으면 촌스럽게 보일까봐 자꾸 영어를 남용하게 되고, 그리하여 영어 잘 못하는 노동자를 소외시킨다. 그뿐이랴.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남용되는 영어 때문에 우리 노동자들이 민주시민으로서 지니고 키워야 할 통찰력을 봉쇄당한다.

 

말과 문자는 치명적인 권리의 문제

 

우리말과 한글의 소중함을 말할 때, 나는 그것이 우리 것이기에 소중하다는 민족주의 정서를 조금 더 넘어서자고 주문한다. 말과 문자는 그저 가치중립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권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알 권리를 제대로 누릴 수도 있고 심각하게 침해당할 수도 있다. 특히 정부와 공공기관, 언론, 법률 등에서 사용하는 공공언어가 그렇다. 거기에는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서 안전과 재산, 권리와 의무, 기회와 한계 등을 좌우하는 정보와 규정이 언어 형식으로 담겨 있다. 그런 말을 못 알아 듣는다면, 그 때문에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놓친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국어 사용의 권리는 노동과도 바로 맞닿는다. 우리 헌법 제33조에는 근로의 권리가 규정되어 있다. 근로계약을 맺을 때 노동자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내용을 노동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면, 노동자의 권리는 보장될 수 없다.

 

그러므로 외국인이 근로계약의 당사자가 아닌 한, 근로계약, 취업 규칙, 사규, 업무지시 등에 외국어나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하면 노동자가 권리를 행사하는 데 걸림돌이 되며, 자칫하면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준다.
그저 맞춤법이 전부가 아니다. 언어는 인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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