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귀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자문위원, nohojk@hanmail.net
본 연구에서 주요하게 살펴보았던 부분은 노동자 정치조직으로 출범한 대한노총이 어떻게 파업을 단행하고 지지정당을 자주적으로 선택하는 노동조합으로 진화해 갔는지에 대해서다. 정권의 억제작용과 현장의 촉진작용을 주요 변수로 보았다.
대한노총 조직이 노동조합 조직으로 진화하는데 5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50년의 역사 중 40년은 사실상 정권이 헌법을 유린한 시대였으며, 30여년은 노동력이 무제한으로 공급되어 노동자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시기였다.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럼에도 대한노총이 퇴출되지 않고 진화의 길을 갔던 것은 현장에서 ‘노동조합성’이 꾸준히 성장해갔기 때문이다.
대한노총은 당초 노동조합 조직이 아니라 우익 노동자 정치조직으로 출범하였고 전평과 맞대결하는 것이 조직의 임무였다. 노동조합성이 전혀 없는 조직이었고 그것을 당연시했다. 오로지 그들 노선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노동자 보호문제는 후순위 과제로 제쳐두었다. 독립국가 수립이 최우선 과제였던 해방정국에 있을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논리는 달랐다. 정치조직이든 무엇이든 노동자 대중을 조직하려면 노동자의 일상적 요구를 해결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전평이라는 상대조직이 노동자 보호를 조직의 임무로 내걸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과의 경쟁 차원에서도 노동조합적 외피를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군정도 대한노총이 노동조합성을 갖추도록 권장했다. 그래서 대한노총도 머지않아 전평과 매우 유사한 강령들을 채택하고 부분적으로 교섭에도 임하며 사용자의 탄압으로부터 산하 조직을 지키려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대한노총의 우선적 목표는 여전히 정치적 과제 실현이었다. 대한노총은 전평타도를 위해 혈투를 전개했다. 결국 이승만 등 우익의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대한노총도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정권에 대한 교섭력을 상당 정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대한노총은 헌법 제정 시 ‘노농8개조’를 요구하여 노동3권과 이익균점권을 획득하였다. 헌법에 대한 이와 같은 요구관철은 70년 역사상 유일무이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 수립 이후에도 대한노총은 노동조합 조직으로 전환하기 위한 명확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대한노총을 노동조합 조직으로 세우려 한 혁신파 그룹이 있기는 했지만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대한노총 지도급 인사 다수는 여전히 정치조직적 관성에 머물러 있었다. ‘개국공신’이라는 기회구조가 그러한 관성을 더 강화시켰을 것이다. 정권도 그러한 방향의 대한노총을 선호하였을 것이다. 외곽조직처럼 부릴 수 있고 ‘경제재건’에 대한 협력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급부도 있었다. 이승만은 주요한 길목에서 대한노총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반대급부는 대한노총의 정치조직적 관성을 지속시키는 심리적 지지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독재자의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노동조합의 구도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한민당의 이탈 후 독자세력화를 모색하고 대한노총 등 4개 대중조직들을 토대로 자유당을 설립하였다. 대한노총은 처음에는 자유당 내에서 일정한 지분을 가질 수 있었지만 자유당이 관료화되어 가면서 점차 당의 외곽조직으로 전락해 갔다.
그럼에도 현장에서는 노동조합성이 성장해 갔다. 대한노총 출신 국회의원들이 파벌을 떠나 힘을 합해 제정했던 1953년의 노동법이 그러한 성장을 촉진했다. 그 결과 1950년대 중반이 되면 대한노총 중앙무대에서도 현장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탈자유당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주요 노조들은 노동쟁의를 당연한 절차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1959년에는 김말룡 등이 주도하여 단위노조 혁신을 주요 기치로 내건 제2노총 조직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설립하였다.
현장으로부터 성장해 올라온 노동조합성은 4.19 민주혁명의 공간에서 꽃필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다시 꺾이게 되었다. 5.16 쿠데타 정권은 노동조합을 해산한 후 다시 재편하게 되는데 조직재건의 밑그림은 대한노총 산하 산별조직 간부 3인 등 5인 팀에서 그려졌다. 1980년에 전두환 신군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한 ‘노동계 정화’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문제의 3인은 현장으로부터 커 올라온 노동조합성을 상당 정도 포괄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노총과는 다른 조직관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지역연맹과 산별연맹을 구성조직으로 한 대한노총과는 달리 산별만 구성조직으로 제시했다. 둘째로는 아예 산별노조 체제로 바꿀 것을 제시했다.
노동조합 재편 이후 1960년대에는 노동조합성이 이전과는 다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한국노총은 쿠데타 정권에 협력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재량공간을 활용하여 조직을 확대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활동을 매우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71년에는 50만 명의 조직으로, 1978년에는 100만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단체협약 체결사업장 비율을 50% 정도에서 80%대로 급상승시켰다. 섬유나 외기 등 사업장에서는 산별 또는 업종별 파업투쟁을 전개하는 등 새로운 노동운동의 기운을 보여주었으며 한국노총도 총파업을 배치하여 투쟁하고 정치세력화를 선언하는 등 노동조합적 기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이 영구 독재체제 구축과 노동운동 탄압에 나섰기 때문이다. 정권은 한국노총을 더 이상 1960년대식의 파트너로 간주하지 않았다. 탄압의 대상으로 하였고 정권의 들러리가 되도록 강제하였다. 이러한 성향은 1980년 신군부체제 하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정권에 대한 지지를 강요하고 노동계 정화를 통해 노동조합 재정이나 전임자 등을 억제했다. 또한 기업별노조체제도 강요하고 파업권도 봉쇄하였다. 이러한 정치체제 하에서 노동조합성의 표출이 억제 내지 자제되었다.
그럼에도 현장의 노동조합성은 꺾이지 않았다. 전태일 열사의 산화가 격렬한 투쟁의 길을 열었다. 권력에 굴종하는 한국노총 지도부에 대한 거센 질타도 있었다. 현장의 일부는 ‘민주노조’ 블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변혁운동 진영이 노동현장으로 진입하였다. 극심한 노동통제를 받았던 중공업 분야의 노동자들도 노조결성에 나섰다. 그와 같은 마그마들이 모여 1987년 6월 항쟁으로 엷어진 지층을 뚫고 노동자 대투쟁으로 분출하였다. ‘민주노조’ 블록은 세를 강화하여 제2노총 건설의 길을 가게 된다. 한국노총의 현장도 민주화되었다. 이러한 안팎의 조건 하에 한국노총은 운동방법을 급속히 개혁하여 노동조합성을 높여 갔고 결국 총파업을 단행하고 지지정당을 자주적으로 선택하는 조직으로 성장해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