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범 아베규탄 시민행동 언론팀장
대법원 판결, 1965년 한일협정 체제에 균열을 내다
강제징용 피해 노동자에 대한 우리 대법원의 판결에 맞서 아베 정권의 경제 보복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하고 배상 판결을 내린 2012년, 2018년 대법원 판결은, “한일 협정으로 일본에 대한 청구권이 모두 소멸하였다”는 기존의 해석을 뒤집고, 일본에게는 면죄부를, 우리에게는 굴욕만을 주는 1965년 한일협정 체제를 넘어,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보편적 정의, 인권에 기초한 새로운 한일관계를 수립하는 길로 나아가는 첫 걸음으로 기록될 역사적 판결이다.
1965년 한일협정은 국민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맺어진 수교였고, 8억 불 수준의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아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배상 의무는 ‘청구권’이라는 이름아래 모두 소멸되었다. 2012년 판결이 있기 불과 2주 전까지도 일제 치하 피해의 배상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논리에 의해 가로막혀왔다.
그러나 향후 모든 판결의 기준이 되며, 한 국가의 입장이라 간주할 수 있는 대법원 판결에 의해 이러한 기존의 해석은 부정되었다. 이제 한일협정에 대한 우리나라의 공식 입장은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가 아니라, “일본이 끼친 피해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개인 청구권이 살아 있다”가 되었다. 러한 대법원 판결은 일본의 진정한 반성과 사죄, 배상을 끝없이 요구해왔던 국민의 승리이며, 우리가 향후 계속 지켜나가야 할 입장이다.
아베의 적반하장
낡은 질서가 한계를 맞이하여 균열의 조짐을 보이게 되면, 선택은 두 가지다. 새로운 질서로 낡은 질서를 대체하거나, 아니면 낡은 질서를 지키려 하거나이다. 전범국이자 가해자인 일본은, 마땅히 피해자인 우리 국민들과 우리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여,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반성을 기반으로 하고, 보편적 정의와 인권에 기초한 새로운 한일관계를 지향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베 정권의 대응은 정반대였다. 그간 진정한 사죄와 반성 없이 우리 국민의 분노를 억눌러왔던 한일협정 체제에 안주하며 군국주의 부활의 야욕을 키워왔던 일본은, 이러한 우리 국민의 요구를 거부하고, 한국 정부에 사실상 대법원 판결의 취소를 요구하며 경제보복으로 답하였다. 낡은 질서를 지켜내기로 한 것이다. 이는 경제 보복을 통해 한국을 길들이고, 이번 갈등을 통해 정권의 지지를 강화해 결국 평화헌법을 바꿔 전쟁가능 국가로 나아가겠다는 군국주의 부활 선언이다.
정부의 단호한 대응을 요구한다
지난 22일 정부는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맞대응 조치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을 파기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적대국 취급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군사정보를 제공할 이유가 없다는 점과 기존의 사대주의적 관성을 깼다는 점에서 국민 다수가 지지하고 있다.
다만 “수출규제를 철회하면 재협상이 가능하다”는 총리의 언급으로 보아 완전 파기가 아닌 지렛대로 활용하려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점은 우려스럽다. 이러한 방식은 자칫 졸속협정이었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일본의 수출규제와 바꾸면서 오히려 없던 정당성을 부여할 위험성이 있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한일 군사동맹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에, 수출 규제 해제와 같은 사안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해법으로 소위 ‘1+1안’(대일청구권자금을 받은 포스코 등 한국 기업과 일본 전범기업의 뒤를 이은 기업들이 함께 자금을 조성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자는 안)이라는 절충안을 제시한 바 있으며,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여기에 한국정부까지 포함한 ‘1+1+α’을 제시할지에 대한 검토를 하고 있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나오기도 하였다. 물론 정부는 ‘1+1안’이나 ‘1+1+α’을 부정하고 있지만 이 안들은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크게 훼손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이 판결한 것은 ‘배상’이지 ‘위로금’이 아니며, 국내 기업과 정부가 포함되면 일본 기업의 배상이라는 취지가 크게 퇴색할 수밖에 없다. 이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요구가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배상이지 화해치유재단의 위로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한일관계 수립을 위한 대장정에 나서자!
일본의 경제보복이 시작되면서, 우리 국민들은 대대적인 불매운동과 대규모 촛불을 통해 새로운 한일관계를 향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냉전시기 대립구도에 의해 탄생한 1965년 한일협정은 한일관계를 왜곡했다. 냉전 대립구도 역시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북미 정상이 만나고,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과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은 공존할 수 없고,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한일관계가 요청될 수밖에 없다.
시대도, 국민도, 대법원 판결도 정부의 단호한 대응을 요구한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파기했던 그 기개로, 이 기회에 낡은 한일관계를 넘어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반성에 기초한, 보편적 정의와 인권에 입각한 새로운 한일관계를 만들겠다는 결의를 보여줘야 한다. 아울러 악화된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막아낼 평화의 바람을 몰고 온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